보통 일본은 저작권을 준수하고 상대방의 권리를 보호해주는 나라라는 인식이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일본 기업들이 다른 기업의 IP(지식 재산)를 비교적 잘 지키면서 사업을 진행하고 있죠.
원피스, 나루토, 마리오 등 세계적인 IP들이 등장하고 글로벌 시장에서 승승장구하는 것도 이러한 저작권 인식을 바탕으로 원 IP 보유자들이 충분한 수익을 거두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 회사들도 처음부터 저작권 정신이 투철한 건 아니었습니다. 우리들이 잘 아는 닌텐도와 세가 같은 일본을 대표하는 게임사들도 게임 초창기 시절에는 저작권 문제로 소송에 시달린 경험이 있습니다.
닌텐도 로고. 출처: 닌텐도 유럽 홈페이지
저작권과 관련하여 닌텐도에게 다가온 가장 큰 위기는 ‘동키콩’이었습니다. ‘동키콩’은 지금은 닌텐도를 대표하는 거대한 고릴라 캐릭터이자 게임이지만, 초창기 미국의 영화 ‘킹콩’을 표절했다는 이유로 소송에 휘말리게 되었죠.
사건의 과정은 이렇습니다. 1980년에 닌텐도는 당시에 유행하던 세로형 비행기 슈팅 게임인 ‘갤럭시안’을 베낀 ‘레이더 스코프’라는 오락실 게임을 미국에 수출하게 되는데요, 이 게임이 인기를 얻지 못하고 망하면서 난감한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미국에 이미 배송한 ‘레이더 스코프’가 3천 대에 이르는데, 이중 2천 대를 폐기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거죠.
긴급히 닌텐도에서는 ‘레이더 스코프’를 대체할 게임을 찾게 되고, 슈퍼마리오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미야모토 시게루가 구원투수가 되어 3개월 간의 긴급 개발 끝에 거대한 고릴라가 등장하는 ‘동키콩’이라는 게임을 만들게 됩니다.
닌텐도 대표 캐릭터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 동키콩. 출처: 닌텐도 유럽 홈페이지이 ‘동키콩’은 주인공인 마리오가 여자친구를 구하기 위해 공사장을 오른다는 내용이었죠. 동키콩이 던지는 드럼통을 피해 올라가는 흥미진진한 게임성은, 기존의 주류였던 비행기 게임에 비해 참신하게 다가왔으며 이 동키콩을 들여놓은 가게는 술이 팔리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얻었습니다. 동키콩 기계 마다 동전이 꽉 차서 수시로 동전통을 비워야 했다고 전해지죠.
유니버설 스튜디오와 분쟁에 휩싸인 ‘동키콩’. 출처: 게임 포스터 및 스크린샷 캡처 문제는 이 ‘동키콩’의 엄청난 인기로 인해 ‘킹콩’의 저작권자들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중에서도 ‘동키콩’을 유심히 본 기업이 있었으니.. 바로 유니버설 스튜디오 였습니다. 거대한 고릴라가 등장한다는 점, 미녀를 납치했다는 점, 고릴라 이름이 콩으로 끝난다는 점 등을 빌미로 유니버설 스튜디오는 닌텐도를 압박했죠. 거대 기업의 압박에 당시 작은 기업이었던 닌텐도의 위기감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닌텐도의 법률 고문 ‘하워드 링컨’과 그의 동료 ‘존 커비’는 유니버설 스튜디오가 온전히 ‘킹콩’의 저작권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취약점을 파악하게 되고, 이점을 파고 들었습니다. 결국 재판을 담당했던 ‘로버트 스위트’ 판사는 유니버설 스튜디오가 킹콩의 독점 상표권을 지니고 있다고 판단할 수 없다고 판결했고, 닌텐도는 겨우 위기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세가 로고. 출처: 세가 공식 홈페이지 그렇다면 세가는 어땠을까요? 세가는 1985년부터 아케이드 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회사였습니다. 2D이지만 3D 효과를 내는 체감형 바이크 레이싱 게임인 ‘행온’이 대히트를 치면서 북미에서도 그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죠.
‘행온’을 개발한 유 스즈키는 기세를 몰아 본격적으로 유럽을 배경으로 한 새로운 레이싱 게임을 개발하게 되는데, 그 게임이 바로 ‘아웃런’이었습니다. 미려한 빨간색 오픈카를 타고 미녀와 함께 해변가를 달리는 모습은 남자들의 마음에 불을 지피기에 충분했습니다. 경쾌하고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다른 차들을 추월하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환상적이었죠. ‘아웃런’ 역시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됩니다.
세가의 ‘아웃런’에 선명히 박혀있는 페라리 엠블럼. 출처: 게임 스크린샷과 패키지 사진 캡처 하지만 그러한 세가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아웃런’이 큰 인기를 끌자 페라리에서 자신들의 자동차 디자인권을 무단으로 침해했다며 소송을 건 것입니다. 법원에서 세가는 ‘아웃런’에 등장하는 자동차가 가상의 오리지널 자동차라고 주장했지만, 뒤에 선명하게 박혀있는 페라리의 엠블럼이 발목을 잡았습니다. 결국 세가는 패소했고, 페라리에게 합의금을 낼 수 밖에 없었으며 이후부터는 페라리와 정식 라이선스를 맺고 레이싱 게임을 출시하게 됩니다.
이렇게 닌텐도와 세가의 소송 사건을 살펴보면, 1980년도에는 닌텐도와 세가도 저작권에 대한 개념이 정립되지 않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 시기에 다른 일본 게임사들의 게임들 중에서도 저작권을 위반한 경우를 쉽게 찾아볼 수 있죠.
일례로 ‘몬스터헌터’나 ‘스트리트 파이터’ 등으로 유명한 캡콤은 ‘스트리트 파이터 2 대시’에 등장하는 복서 캐릭터를 당시 최고의 복싱 스타 ‘마이크 타이슨’을 본 따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비슷하게 M.바이슨이라고 이름을 붙였죠. 하지만 북미에서 저작권 문제가 생기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북미 수출 버전에서는 ‘발록’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게 됩니다.
저작권 우려로 이름이 ‘M.바이슨’에서 ‘발로그’로 바뀐 복서 캐릭터. 출처: 게임 스크린샷 캡처 세가는 자사의 유명 액션 게임인 ‘베어너클’ 2를 출시하면서 표지 화면에 영화 ‘터미네이터’의 기계인간으로 열연한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얼굴을 넣었습니다. 코나미에서도 대표작 ‘메탈기어’ 시리즈에 영화 ‘터미네이터’의 장면을 표절하여 넣기도 했죠. 지금 보면 ‘와 일본도 이런 시절이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됩니다.
다만 이러한 닌텐도와 세가 등의 여러 소송전들이 소문이 나면서 각 국가들도 순차적으로 저작권 개념이 정립되기 시작했고, 국내에서도 1990년대에는 저작권 개념이 확립되게 됩니다. 이러한 저작권 분쟁은 완전히 근절되지는 않고, 안타깝게도 지금도 간헐적으로 일어나고 있긴 하지만, 이렇게 저작권을 지키고 보호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콘텐츠 산업을 확장하는 길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업계가 다시 한 번 깨닫고 공정 경쟁을 위해 노력해야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