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서 논문-특허 데이터 분석
논문 2580만 편 연구 주제분석… 연구자의 과거-최신 논문 비교
주제 달라지면 인용 확률 2%뿐… 韓, 정책-산업에 민감하게 반응
중장기 주제로 성과 내기 어려워… 연구비 지원에 따라 진행 되기도
연구자들이 주력 분야에서 벗어날수록 연구 영향력이 떨어진다는 분석이 나왔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노벨 과학상 수상자들은 보통 30세 전후에 연구 아이디어를 수립하고 수십 년간 동일한 연구를 이어가는 과정에서 과학계를 놀라게 하는 성과를 낸다. 노벨상은 이 같은 연구 성과가 인류에 얼마나 기여하는지를 따져 수상자가 선정된다.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연구를 지속할 수 있어야 영향력이나 경쟁력 있는 연구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반대로 주력하던 연구 분야를 자주 바꾸는 경우 그만큼 영향력을 발휘하기 어려운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연구자들이 주력 연구 분야에서 멀어질수록 새로운 분야 연구의 영향력이 낮아진다는 점이 대규모 연구를 통해 입증됐다. 왕다순 미국 노스웨스턴대 교수 연구팀은 수천만 편의 논문과 특허 데이터를 분석해 이러한 현상을 뜻하는 ‘피벗 페널티(pivot penalty)’를 도출하고 연구 결과를 28일(현지 시간)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발표했다. 연구에 따르면 연구자는 다양한 이유로 연구 주제를 바꾸지만 그 과정에서 새로운 연구가 주목받을 가능성은 뚜렷이 낮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가 의지를 보이는 분야에 따라 연구 트렌드 전환이 잦은 한국의 과학기술계가 이번 연구 결과에 주목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장기 연구로 전문성이 쌓이지 않으면 연구의 질 하락은 물론 글로벌 학계에 미치는 영향력이 낮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 연구 주제 바꾸면 영향력 낮아져
이번 연구는 1970년부터 2015년까지 발표된 2580만 편의 논문과 1985년부터 2015년까지 미국 특허청에서 승인된 170만 건의 특허 데이터를 바탕으로 연구자들이 기존에 주력하던 연구 주제에서 얼마나 멀리 멀어졌는지를 수치화했다.
연구팀은 논문에서 인용한 학술지 분포를 기반으로 ‘주제 거리’를 측정하는 독창적인 방법론을 제시했다. 연구자가 작성한 최신 논문이 이전 3년간 발표한 논문과 얼마나 다른 주제에 위치하는지를 수치화했다. 그 값이 클수록 ‘피벗’ 강도가 높다고 판단했다. 그 결과 주제를 거의 바꾸지 않은 ‘로(low) 피벗’ 논문은 상위 5% 인용 논문이 될 확률이 7.4%로 연구팀이 기준점으로 잡은 5%보다 높았다. 반대로 연구 주제를 가장 크게 전환한 ‘하이 피벗’ 논문은 상위 5% 인용 논문이 될 확률이 2.2%에 불과했다.
특허 분석에서도 유사한 경향이 나타났다. 연구자가 주제를 거의 바꾸지 않은 특허는 상위 5% 인용 특허가 될 확률이 8.0%로, 기준점보다 높았던 반면 주제를 크게 전환한 특허는 이 비율이 3.8%에 그쳐 성과가 크게 떨어졌다. ‘한 분야에 몰두한 축적의 힘’이 연구 성과의 질과 성과 확산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이번 연구의 결론이다.
● “한 우물 파기 어려운 국내 현실”
국내에서는 연구자들이 오랫동안 한 분야를 지속하기가 구조적으로 어렵다는 게 대체적인 견해다. 정부가 초점을 맞추는 정책 등 외부 조건에 따라 주제를 빈번히 바꾸는 ‘강제 피벗’ 환경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2016년 박희제 경희대 교수 연구에 따르면 한국 공공부문 연구자들은 연구 주제를 결정할 때 순수한 과학적 관심 외에도 외부의 이해관계, 정책 흐름 등 다양한 요인을 고려한다. 박 교수는 “과학자들이 자유롭게 연구 주제를 선택할 수 있는 제도적 자율성이 부족하고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 등은 특히 정책 목표나 산업계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의 2023년 보고서에서도 ‘정부 수요 대응형 과제’를 선호하는 경향이 확인됐다. 산·학·연 1000여 명의 연구자 대상 설문조사에 따르면 상당수 연구자들은 국가 정책과 산업 트렌드 변화에 따라 연구 방향을 조정할 수밖에 없다고 인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자들은 “정부의 지원은 각 부처가 생각하는 성과 창출을 쉽게 이루는 방안으로 집중되고 있다”며 “연구 채택 가능성이 결국 연구비 지원 여부에 달려 있는데 정부는 늘 자율성을 강조하겠다고 하지만 창의적인 연구주제에 착안할 수 있는 현실적 여건이 열악하다”고 토로했다.
한 출연연 연구원은 “정부 연구개발(R&D) 과제는 보통 3년 단위로 끊기기 때문에 중장기 주제를 밀고 가기 어렵다”며 “매년 주제를 수정하거나, 다음 과제 심사를 위해 트렌디한 키워드를 덧붙이곤 한다”고 전했다.
연구비 중심의 경쟁 구조가 자율적인 장기 연구보다 생존을 위한 ‘연구 전환’을 강요하는 환경을 만들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는 “이번 연구는 연구자가 새로운 연구분야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성과를 내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