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 연패 속 팬 우울증·화병 “함께 이겨내자” 외친 롯데팬 정신과 전문의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8월 27일 14시 2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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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석 연세봄정신건강의학과 원장은 1992년 초등학생 시절 롯데의 한국시리즈 우승이 야구팬 입문 첫 기억이다. 그 후로 한 번도 한국시리즈 우승을 하지 못한 롯데를 33년째 응원 중인 박 원장은 “저도 주식 실패로 자신을 미워했던 적이 있다. 자신의 미성숙하고 못난 모습이 이 팀에서 보여서 더 잘됐으면 하고 응원하게 된다”고 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롯데 야구 때문에 우울증, 화병, 불면증, 공황장애 걸리신 분들. 유니폼 입고 저희 병원 방문해주세요. 함께 이겨냅시다.’

프로야구 롯데가 11연패에 빠졌던 22일 밤. 박종석 연세봄정신건강의학과 원장(44)은 소셜미디어에 이런 글을 올렸다. 롯데는 결국 24일 창원 NC전에서 선발 전원 안타를 터뜨리며 17-5, 12점 차 승리로 12연패를 끊어냈다.

연패 탈출 다음 날인 25일 박 원장을 만났다. “다행히 유니폼을 입고 온 환자는 없었다”는 박 원장은 “어제도 졌으면 진짜 오셨을 수도 있다. 한화 팬들이 ‘롯데와 한화는 조류동맹인데 한화 팬은 안 되냐는 문의도 주셨다”며 웃었다. 한화도 당시 6연패에 빠져 있었다.

박 원장이 ‘무료 상담’을 내걸게 됐던 22일 창원 NC 방문경기에서 11연패를 당한 롯데 선수단이 팬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롯데는 이날 1회부터 3-0으로 앞섰으나 3회 3-3, 7회 6-6 두 차례 동점을 허용한 뒤 결국 9회에 한 점을 더 내주고 1점 차(6-7)로 패했다. 박 원장은 “12연패 때보다 이날이 더 화가 났다. 숨이 안 쉬어지더라”고 했다. 롯데 자이언츠 제공
박 원장이 ‘무료 상담’을 내걸게 됐던 22일 창원 NC 방문경기에서 11연패를 당한 롯데 선수단이 팬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롯데는 이날 1회부터 3-0으로 앞섰으나 3회 3-3, 7회 6-6 두 차례 동점을 허용한 뒤 결국 9회에 한 점을 더 내주고 1점 차(6-7)로 패했다. 박 원장은 “12연패 때보다 이날이 더 화가 났다. 숨이 안 쉬어지더라”고 했다. 롯데 자이언츠 제공
박 원장은 “연패가 길어지니 ‘팀 분위기가 안 좋다’, ‘내부 갈등이 있다’ 같은 뜬소문까지 퍼졌다. 불안이 의심을 낳고 음모론으로 확장된 것이다. 화나는 감정을 공유하고 ‘내일은 이기겠죠?’ 하는 희망을 나누고 싶어서 적었던 글”이라고 했다.

부산 수영구 남천동 출신으로 대학 때 서울로 상경한 박 원장은 자신을 ‘서울 갈매기’라 부른다. 6년 전 ‘정신의학신문’에 기고한 ‘롯데 자이언츠 유발성 우울증’도 화제였다. 특정 자극으로 유발된 우울감과 불안감이 2주 이상 강하게 지속되고 일상생활까지 영향을 주면 ‘OO 유발성 우울증’이란 진단이 가능하다는 내용을 담았다.

박 원장은 “연패 기간에는 팬, 선수 모두 무기력이 학습된다. ‘오늘은 이기겠지’ 하는 기대가 배신당하면 기댓값이 준다. 그러면 선수 자신도 자신감이 떨어지는 악순환에 빠진다. 이러면 집단 우울증에 빠질 수 있다”며 “가장 좋은 방법은 이기는 거다. 부정적 경험이 멈추면 새롭게 내일을 기대하게 된다”고 했다.

1999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앞두고도 한국시리즈 경기를 모두 챙겨봤을 정도로 롯데 야구라면 만사를 제쳐두는 팬 중 한 명인 그 역시 연패 기간 불안과 공황 증세를 겪었다. 특히 롯데는 14일 대전 한화전에서 연장 11회말 ‘밀어내기 볼넷’으로 허무하게 경기를 내줬다. 17일 사직 삼성전에서는 9회말 황성빈의 극적 솔로포로 8-8 동점을 만들고도 10, 11회 끝내기 기회를 모두 살리지 못하고 무승부로 마쳤다.

박종석 원장은 “물론 팀이 12연패를 하다 보면 욕이 나오고 분노할 수도 있지만 지나친 과몰입은 일상까지 망가뜨릴 수 있다. 그럴 땐 약간만 야구를 내려놓고 가볍게 보시는 걸 추천한다. 야구를 보면서 운동을 하셔도 좋다”며 “롯데에는 아직 20대 초중반의 완전히 성숙하지 않은 청년들이 많다. 이 선수들을 의심하고 지적하기보다는 한 사람으로서의 성장을 기다려 줄 필요가 있다”고 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박 원장은 “특히 연장까지 가면 경기가 늦게 끝나지 않나. 화난 상태로 자려고 하니 불면증으로도 이어져 다음날까지 망칠 수 있다. 그런 날은 꼭 샤워하고 잤다”며 “찬물 샤워는 미주신경을 자극해서 불안 호르몬인 노르에피네프린은 낮추고 행복감을 주는 세로토닌은 높인다. 찬물로 손만 씻어도 분노가 가라앉는 효과가 있다”고 했다.

야구로 솟구친 화를 가라앉히는 가장 빠른 방법으로는 향수를 추천했다. 그는 “감정을 전환하는 게 중요한데 인지기능을 거치지 않고 뇌 심부로 바로 들어오는 후각이 가장 빠르게 안정감을 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롯데 팬의 분노가 특히 큰 건 전반기 타격 1위(타율 0.280)였던 팀의 후반기 타격이 10위(0.241)로 고꾸라졌기 때문이다. 박 원장은 “실망도 전반기에 잘했기 때문에 하는 것”이라며 “내 정체성과 롯데를 동일시하는 팬들은 과몰입하고 일희일비하게 된다. 하지만 팬이 조급해지면 선수는 더하다. 경기력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박 원장은 “선수들은 불안 호르몬을 늘 일정 수준 이상 안고 사는데 연패가 길어지면 과도한 각성이 생긴다. 조금만 자극해도 평소에는 반응하지 않을 일에도 반응하고 예민해진다. 최근 KIA 선수가 팬과 (인스타그램에서) 설전을 벌인 경우도 마찬가지”라며 “팬이 할 수 있는 건 선수들이 자기 회복력으로 해결하게끔 기다려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종석 원장은 롯데 최동원을 다룬 다큐멘터리 ‘1984 최동원’이 개봉하자 최동원의 11번 유니폼을 챙겨 입고 극장에 갔다. 최동원은 1984년 한국시리즈 때 혼자 4승을 거두며 롯데의 첫 우승을 이끌었다. 박종석 원장 제공
프로야구 역사상 한 시즌에 11연패 이상을 하고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경우는 아직 한 번도 없다. 롯데 팬들은 확률 ‘0%’를 응원하고 있는 셈이다. 주식 투자 실패로 극심한 우울증에 빠졌던 경험이 있는 박 원장은 “돈을 걸어야 한다면 롯데에 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스포츠가 꼭 이성적인 것만은 아니다”라고 했다.

“바보 같은 실책을 볼 때면 주식으로 망했던 내가 떠오른다”는 그는 “팬들이 롯데에 바라는 건 버티고 티끌만큼이라도 발전하는 모습이다. 그게 곧 우울을 벗어나는 방법”이라고 했다.

“살면서 우울증도 걸릴 수 있고, 망할 수도 있어요. 그래도 인생은 계속되는 거잖아요. 롯데도 야구를 계속하고 우승을 꿈꿀 수 있는 거예요. 실패하더라도 새 시즌에 늘 새롭게 성장할 수 있다는 마음을 갖게 해주는 것, 그게 스포츠와 야구, 그리고 이 팀의 매력 아닐까요.”
#롯데 자이언츠#연패#우울증#공황장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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