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정도 시야로 이번 사안을 보는지에 따라 판단이 갈릴 것이다. 원자력계 일원으로서 매번 웨스팅하우스(WEC)에 로열티나 일감을 지급해야 한다는 사실은 당연히 탐탁지 않다. 그러나 WEC와 합작사 설립, 즉 ‘미국과 손잡고’ 시장을 확대해 나간다는 차원에서 한국은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 점을 고려한다면 WEC와 맺은 계약을 굴욕으로만 볼 수 없다.”
국내 원전업계 한 관계자가 최근 ‘불공정 계약’ 논란을 일으킨 한국수력원자력·한국전력(이하 한수원)과 미국 원전 기업 WEC 간 비공개 합의에 관해 한 말이다. 한수원과 WEC는 1월 한수원이 원전 1기를 수출할 때마다 WEC에 1억7500만 달러(약 2400억 원)의 기술 사용료를 내고 6억5000만 달러(약 9000억 원)의 물품·용역을 주문해야 한다는 계약을 체결한 것으로 알려졌다. 계약 기간은 50년이며 이 기간 한국이 북미, 유럽(체코 제외), 영국, 일본, 우크라이나 등 시장에 신규 진출할 수 없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이에 한수원이 체코 원전을 무리하게 수주하려다 WEC와 사실상 ‘노예 계약’을 맺은 것 아니냐는 논란이 일었다.
“유럽·일본 열려 있지만 닫힌 시장”
우선 문제가 된 부분은 지나치게 긴 계약 기간이다. 체코 원전 전체 사업비 가운데 WEC에 돌아가는 몫(10% 안팎)은 2009년 아랍에미리트(UAE) 원전 때와 비슷하다손 치더라도 50년이나 구속력을 갖는 장기 계약을 체결했다는 지적이다. 원전 수명(APR1400 기준 60년) 대부분에 해당하는 기간으로, 기존에는 양측이 10년 단위 기술이전 계약·협정을 맺어왔다.
이와 관련해 심형진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원자력정책센터장)는 “계약 기간에 대한 지적은 일견 타당하나 현재 추진 중인 한수원과 WEC의 합작사가 얼마나 성과를 내는지 지켜본 뒤에 평가해도 늦지 않다”고 말했다. 심 교수는 “체코는 UAE 이후 15년 만에 한국에 찾아온 기회였고 자칫 잘못하면 프랑스로 주도권이 넘어가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수원이) 50년이라는 기간을 받아들인 측면이 있는 것 같다”며 “그러나 이것이 원전 300기를 추가로 짓겠다는 미국 진출을 염두에 둔 선택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고 설명했다.
한수원과 WEC는 최근 미국 내 원전 건설 계획과 관련해 조인트벤처(JV) 형태의 합작사 설립을 논의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2050년까지 원전 300기(기당 1GW)를 증설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때 원전 설계와 기술 공급에는 강점이 있지만 시공 역량은 떨어지는 WEC가 시공 경험이 풍부한 한수원과 ‘팀 코러스’(Team Korea+US) 차원의 파트너십을 모색하려는 것이다. WEC는 1979년 스리마일 원전 사고 이후 신규 원전을 완공한 이력이 없다. 현재 미국의 우방국이면서 원전 설계, 시공, 운영, 유지·보수 등 종합적 건설 능력을 갖춘 나라는 한국과 프랑스뿐이다. 이에 합작사 구상이 현실화할 경우 50년간의 기술 사용료와 물품·용역 구입비를 뛰어넘는 실익이 생길 것이라는 분석이다.
또 다른 문제점으로 거론된 건 한국의 주요 원전 시장 진출길이 막혔다는 점이다. 해외 원전 기업의 단독 진출을 허용하지 않는 미국뿐 아니라 그 외 시장까지 내줬다는 점에서 논란이 커졌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전문가들은 “유럽, 일본은 열려 있는 것 같지만 지금도 닫힌 시장”이라며 “오히려 WEC와 함께 문을 두드리는 게 유리하다”고 말했다. 심 교수는 “지금 프랑스는 ‘자신들이 아닌 다른 나라가 유럽에 원전을 짓는 일이 다시는 없어야 한다’는 분위기”라며 “경쟁국 로비 등으로 체코 이후 유럽시장을 뚫기가 더 어려워질 수 있는데, 이때 원전 강국인 미국과 한국이 함께 유럽을 공략하면 프랑스와 대적해서도 승산이 생긴다”고 설명했다. 이어 “일본의 경우 외교·안보상 문제가 첨예하게 얽혀 있어 지금으로서는 진출하기 어려운 곳”이라면서 “원전을 수출할 때는 국방 장비까지 납품 옵션으로 따라붙는 게 일반적인데, 일본 입장에서 한국 군사 장비를 받으려 할 리 없고 합작사를 통해 미국이라는 명분이 있어야만 확장이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한미 정상회담서 SMR 협력 확대키로
향후 합작사의 사업 지분 구조, 책임 부담 방식 등이 한수원에 불리할 수 있다는 우려에 대해서는 시간을 갖고 협상에 나서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유승훈 서울과기대 미래에너지융합과 교수는 “원천 기술을 WEC가 갖고 있기 때문에 한국이 아쉬운 입장인 것은 맞다”면서도 “그러면 반대로 미국이 주저 없이 한국 대신 프랑스를 택할 수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한국은 ‘온 타임 위딘 버짓’(on time within budget: 정해진 비용과 시간 안에 준공할 수 있는 능력)에 특장점이 있다”며 “한수원과 WEC 간 합의가 갑자기 공개되고 연달아 한미 정상회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WEC가 건설 지연 비용을 한수원에 전가하려는 등 유리한 고지에서 줄다리기를 하는 것 같은데, 적절한 조직 체계를 갖춰서 시간을 두고 협상을 풀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정부는 8월 25일(현지 시간) 열린 한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양국 간 원전 협력을 확대해 나가기로 했다. 이날 한수원, 두산에너빌리티, 엑스에너지(X-energy), 아마존웹서비스(AWS)는 소형모듈원자로(SMR) 설계, 건설, 운영, 공급망 구축, 투자·시장 확대 협력에 관한 4자 간 양해각서(MOU)를 작성했다. 이에 앞서 트럼프 행정부가 “한국이 미국에 와서 원전을 짓기를 희망한다”는 뜻을 밝힌 사실이 전해지면서 원전이 조선에 이어 ‘제2 마스가’(MASGA: 한미 조선 협력 프로젝트)가 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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