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복지·산업·교육 등 각종 정책에 쓸 재원을 마련하려고 금융회사들에 손을 벌리면서 금융권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정부는 소상공인 부채 탕감을 위한 ‘배드뱅크’, 인공지능(AI)에 투자할 정책펀드와 관련해 출연을 요청하는 한편 대형 금융회사의 교육세율도 갑절로 올렸다. 금융회사의 수익성에 부담되는 요구를 쏟아내면서 ‘코스피 5,000’ 공약에 맞춘 주주 배당 확대까지 바라는 건 이율배반이란 지적이 나온다.
정부는 7년 이상 5000만 원 이하 소상공인 연체자 부채 탕감에 필요한 배드뱅크 설립 비용 8000억 원의 절반인 4000억 원을 민간 금융권에서 조달할 방침이다. 최대 150조 원 규모로 조성하는 첨단산업 정책펀드도 금융권의 출연을 받을 계획이다. 주요 금융회사들이 부담할 금액은 최소 ‘조 단위’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게다가 정부는 이자·배당금·수수료 등의 연간수익이 1조 원을 초과하는 금융회사에 물리는 교육세 세율을 1%로 올리기로 했다. 지금까지 0.5% 단일 세율을 적용해 왔는데, 대형 금융사의 세금만 두 배로 인상한 것이다. 이로 인해 60여 개 대형 금융회사의 세금 부담은 1조3000억 원가량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금융권에 이런저런 ‘상생 자금’ 출연을 요구하는 명분은 부동산 대출 억제 정책에 따라 은행 등 금융권이 대출금리를 높게 유지하면서 많은 이익을 챙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부의 요구가 반복되고, 규모가 커짐에 따라 금융회사 주주들의 피해가 우려되는 상황이다. 당장 하반기에 4대 금융지주사가 배당·자사주 소각 등 주주 환원에 쓰려던 금액이 당초 3조9000억 원에서 절반 이하로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최근 은행권의 주가가 약세를 보이는 이유다. 게다가 금융회사 경영진이 아무런 반대 없이 정부의 요청을 순순히 따랐다간 개정된 상법에 따라 주주 소송을 당할 위험도 배제할 수 없다.
정부 허가를 받아 필수적 사회서비스를 제공하는 금융 산업은 공공성이 큰 만큼 사회적 책임도 필요할 땐 질 수 있다. 그럼에도 엄연히 사기업인 금융회사의 돈을 정부가 무절제하게 끌어 쓰다가 재무 건전성이 나빠질 경우 그 피해는 예금자 등 금융 소비자들에게 돌아간다. 금융회사를 아무 때나 활용할 수 있는 사(私)금고처럼 대하는 정부의 행태는 자제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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