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시진핑 국가주석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4일 정상회담 결과를 발표하면서 ‘한반도 비핵화’를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시 주석이 “한반도 평화와 안정 수호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고만 밝혔다. 중국은 그간 북한 문제를 거론할 때마다 ‘한반도 평화·안정 수호, 한반도 비핵화, 대화·협상을 통한 문제 해결’이라는 한반도 3원칙을 확고하게 견지해 왔다. 그런데 시 주석이 6년여 만에 김 위원장을 만나 혈맹 복원을 공식화한 자리에서 비핵화 대목을 쏙 뺀 것이다.
장쩌민, 후진타오 주석 등 중국 최고 지도자들은 1차 북핵 위기가 터진 1993년부터 한반도 비핵화 입장을 거둔 적이 없다. 시 주석도 2018∼2019년 5차례에 걸친 북-중 정상회담에서 예외 없이 한반도 비핵화를 거론했다. 이번에 이 표현 자체가 사라진 것은 북한의 핵 보유를 묵인하는 신호로 해석할 수 있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핵을 영원히 내려놓지 않겠다’는 김 위원장과, 그를 열병식에 불러 반(反)서방 연대를 과시한 시 주석의 이해관계가 맞물린 결과이기도 하다. 나아가 김 위원장은 시 주석에게 대만 문제처럼 미중이 첨예하게 맞붙는 사안에서 확실히 중국 편을 들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김 위원장은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북-중 경제 협력 강화는 물론이고 32년을 이어 온 중국의 ‘북핵 불용’ 원칙에 균열을 내는 이득을 챙겼다.
중국이 북핵을 인정할 경우 동결-축소-비핵화로 이어지는 이재명 정부의 3단계 북핵 폐기 구상은 난관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가뜩이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한을 ‘핵 국가’라 부르는 상황이다. 북-미 회담이 성사되더라도 자칫 북한의 요구대로 핵 보유를 허용하는 핵군축 협상으로 변질될 수 있다. 여기에 북한의 뒷배인 중국마저 비핵화 외교 궤도에서 이탈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으니, 김 위원장이 미국에 핵 보유를 강변할 여지가 더욱 커진 것이나 다름없다.
정부는 다음 달 열리는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시 주석을 초청한 상태다. 시 주석은 북핵 문제 해결에 건설적 역할을 하겠다고 수차례 공언한 바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APEC을 계기로 개최가 예상되는 한중 정상회담에서 시 주석에게 이를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핵 보유 용인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서 오랫동안 북핵을 규탄하고, 제재에 찬성했던 중국의 책임과도 어긋난다고 지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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