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경제형벌 규정 8403개, 중복 처벌 2850개, 5중 처벌도 64개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11월 10일 23시 24분


한국 기업이 경영 활동과 관련해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는 행위의 수가 8400개가 넘는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이 중 92%는 최고경영자(CEO) 등 기업인과 법인을 동시에 처벌할 수 있는 ‘양벌규정’ 대상이고, 34%는 2개 이상 제재를 동시에 부과받을 수 있는 행위다. 한국의 법체계가 기업인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한다는 경제계의 불만이 과장이 아닌 것이다.

한국경제인협회가 21개 정부 부처 소관 346개 경제 관련 법률의 형벌 조항을 전수 조사했더니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는 행위가 총 8403개로 집계됐다고 한다. 이 중 7698개 행위는 개인과 법인을 함께 처벌하는 규정이었다. 실무자의 작은 실수에도 회사가 함께 벌을 받는다는 의미다. 하나의 행위로 5중 제재까지 받을 수 있는 64개를 포함해 2중 이상 중복 처벌·제재를 받는 행위도 2850개인 것으로 조사됐다.

중한 처벌이 필요치 않은 고의성 없는 실수, 통상적 활동까지 형사처벌하는 법률이 많은 게 문제다. 라벨이 훼손된 제품을 진열·보관하는 화장품 판매자에게 ‘3년 이하 징역이나 3000만 원 이하 벌금’을 부과할 수 있는 법이 그런 경우다. 자동차 부품업체 임직원이 업계 간담회에서 “원료비 상승분과 같은 수준으로 납품단가를 조정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면 공정거래법상 부당공동행위로 ‘3년 이하 징역’ 처벌이 가능하고, 별도의 벌금·과징금·징벌적 손해배상까지 ‘4중 처벌’ 대상이 된다. 대기업 총수가 계열사 신고를 하면서 왕래가 없는 친인척 관련 자료를 실수로 빠뜨려도 2년 이하의 징역이나 1억5000만 원 이하 벌금을 받을 수 있다.

정부는 연내에 배임죄를 비롯한 과도한 경제형벌을 손보겠다고 했지만 속도가 너무 느리다는 지적이 많다.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6000여 개 경제형벌을 검토해 1년 안에 30% 정도는 개선하겠다”고 한 게 9월인데, 기업들은 체감할 수 있는 변화가 전혀 없다는 반응이다. 정부와 국회는 문제점이 지적된 법률들을 모두 재검토해 비상식적인 형사처벌 규정은 과태료 등 행정제재로 바꾸고, 너무 무거운 형량은 국민 눈높이에 맞춰 조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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