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일 경희대 회계·세무학과 교수좋은 운전자는 가속과 제동을 적절하게 조절해 승객을 편안하면서도 빠르게 목적지에 도착하게 한다. 경제도 마찬가지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금리를 낮춰 경제 성장의 가속 페달을 밟기도 하고, 경기가 과열되면 브레이크 페달로 발을 옮겨 금리를 높여 물가 안정을 돕는다. 앨런 그린스펀(99)은 그런 연준의 베스트 드라이버다.
그린스펀은 1926년 미 뉴욕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음악인을 꿈꿔 줄리아드음악원에서 음악을 공부하고, 밴드에서 색소폰과 클라리넷 연주를 했다. 그러나 곧 재능의 한계를 느껴 경제학으로 진로를 바꿔 1945년 뉴욕대(NYU)에 입학했다.
그는 오랜 기간 타운젠드-그린스펀&컴퍼니의 대표로 경제 컨설팅 사업을 하다가 1968년 리처드 닉슨 공화당 대통령 후보의 캠프에 합류하면서 정관계에 첫발을 디뎠다. 1987년 당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폴 볼커 연준 의장의 후임으로 그린스펀을 지명했다. 이후 그린스펀은 1987년부터 2006년까지 무려 19년간 4명의 대통령(레이건, 아버지 부시, 클린턴, 아들 부시)을 보좌하며 경제 운전대를 잡았다. 그는 시기와 상황에 따른 적절한 경제 개입으로 과도한 인플레이션이나 경기 침체를 피하고, 미국 경제의 성장과 번영에 기여했다.
1987년 연준 의장에 취임하자마자 ‘블랙 먼데이’라 불리는 주가 대폭락 사태를 맞았으나 재빨리 금리를 낮추고 통화량을 늘려 경제 위기를 피했다. 1991년 3월부터 2000년 2월까지 미국 역사상 가장 긴 경제 호황기를 이끌어 ‘마에스트로’(거장)라는 찬사를 들었다. 그가 하는 말 한마디에 온 세계가 귀를 기울였다. 프랑스 최고훈장과 영국 기사 작위를 받는 영광도 누렸다.
그린스펀은 의도적으로 길고 모호한 표현을 사용해 금융시장의 과잉 반응을 방지했는데, 이를 ‘연준화법(Fedspeak)’이라고 부른다. 같은 말을 놓고 언론마다 해석이 크게 엇갈리기도 했다. 그린스펀 이후의 연준 의장들은 보다 명확하고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소통하고 있다.
그린스펀은 2006년 1월 영광스럽게 퇴임했으나, 곧 1929년 대공황 이후 미 최악의 금융 위기인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불명예를 안았다.
2001년 닷컴버블 붕괴와 9·11테러로 인한 경기 침체에 대응하기 위해 금리를 2004년 1%까지 지속적으로 낮췄는데, 이로 인해 저금리 자금이 부동산에 쏠렸다. 금융기관은 신용등급이 낮은 사람들에게도 서브프라임 모기지를 남발하면서 급격한 주택 버블이 형성됐다. 2004년 6월부터는 인플레이션 조정을 위해 1%인 기준금리를 2006년 6월 5.25%까지 꾸준히 인상했다. 그러자 높아진 금리로 인해 이자를 감당하지 못하는 대출자들이 증가하기 시작했고 주택 가격이 하락하면서 결국 2007년과 2008년 부동산이 급격하게 붕괴했다. 대형 금융기관이 파산하고 미 국내총생산(GDP)이 하락하고, 경기 침체로 실업자가 급증해 미국과 전 세계 경제에 큰 상처를 남겼다.
장기간 번영이라는 위대한 업적이 역사상 가장 큰 금융위기로 이어진 사실은 경제 정책이 얼마나 섬세하고 어려운 일인지를 보여준다. 금리라는 페달을 어떻게 밟고 놓아야 할지 고민하는 정책자들은 그린스펀의 영광과 오점을 함께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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