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헌재의 인생홈런]김택수 선수촌장 “국가대표 24년 비결은 자기관리”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3월 31일 23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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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수 진천선수촌장(오른쪽)과 ‘삐약이’ 신유빈이 지난해 파리 올림픽 때 찍은 셀카. 김 촌장은 작년엔 대한탁구협회 부회장으로 활동했다. 김택수 제공
이헌재 스포츠부장
이헌재 스포츠부장
지난달 새 진천선수촌장에 임명된 ‘탁구 레전드’ 김택수(55)에게 선수촌은 집보다 편한 곳이다. 고교 2학년 때 처음 태극마크를 단 김택수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을 앞두고 은퇴할 때까지 17년간 국가대표 선수로 뛰었다. 지도자가 된 후에도 7년 동안 선수촌 밥을 먹었다. 선수, 지도자로 24년간 선수촌에서 살았던 그가 선수촌으로 다시 돌아온 것은 운명일지도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멀고 험한 길이었다. 그가 처음 탁구 라켓을 잡은 건 남들보다 다소 늦은 초등학교 5학년 특별활동 시간이었다. 우연히 출전한 소년체전을 통해 그는 탁구 선수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먹었다. 광주 무진중에 진학하면서 국가대표라는 더 큰 목표가 생겼다. 중학교 선배이자 당대 최고의 탁구 스타였던 김완 감독이 가끔 학교를 찾아 탁구를 쳐 주곤 했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다.

‘악바리’ 김택수는 목표를 향해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남들보다 30분 먼저 훈련을 시작했고, 30분 늦게 연습장을 나왔다. 김택수는 “너무 힘들었지만 참고 견뎠다. 잘 때는 머리맡에 안약을 두고 잤다. 아침에 눈이 떠지지 않으면 안약을 눈에 넣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고 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다. 중3 때 전국대회에서 1등을 했고, 고1 때 청소년 대표가 됐다. 그리고 고교 2학년 때 꿈에 그리던 태극마크를 달았다.

그의 탁구 인생 하이라이트는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이었다. 당시에도 중국 탁구의 만리장성을 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런데 김택수는 남자 단식 4강에서 세계랭킹 3위인 중국의 쿵링후이를 이겼다. 그리고 결승에서 또 다른 중국 선수 류궈량까지 꺾었다. 그 경기에서 나온 32구 랠리는 지금 봐도 가슴 떨리는 명장면이다.

하늘은 그에게 올림픽 금메달은 허락하지 않았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 단식과 남자 복식에서 딴 2개의 동메달이 전부였다. 올림픽 금메달의 꿈을 이뤄준 건 제자 유승민(43·현 대한체육회장)이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때 지도자로 변신한 그는 유승민이 남자 단식 결승에서 중국의 왕하오를 꺾는 데 큰 도움을 줬다. 김택수는 “나도 집념과 의지가 강한 편이다. 그런데 유승민 회장은 모든 면에서 나를 넘어섰다”며 “왕하오의 이면타법에 대비하기 위해 하루 1만 개의 공을 받도록 했다. 그걸 유일하게 버틴 게 유 회장이다. 남다른 집념과 체력이 있었다”고 했다.

그가 선수, 지도자로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은 철저한 자기관리다. 술은 마시지만 12시를 넘기지 않는다. 가능한 한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며, 잠을 충분히 잔다. 선수 때와 비교해 몸무게도 거의 변하지 않았다. 많이 먹은 날은 그만큼 걷거나 뛰며 어떻게든 칼로리를 소모한다. 튀긴 음식이나 패스트푸드를 피하고 신선한 야채류와 해산물을 즐겨 먹는다.

마음의 고향과 같은 선수촌의 수장으로 돌아온 그는 “선수 때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면 세계 정상으로 가기 위해선 한계를 넘는 훈련밖에 없다. 그렇게 노력해도 운이 따라야 올림픽 메달을 딸 수 있다”며 “가장 중요한 건 선수 스스로 깨닫고 하는 훈련이다. 선수들에게 확실한 동기부여를 주는 게 내 역할”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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