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흔히 ‘백의의 천사’로 알고 있는 플로렌스 나이팅게일(1820∼1910·사진)은 뛰어난 수학자이자 통계학자이기도 했습니다.
나이팅게일은 여성의 사회적 역할과 교육이 엄격히 제한되었던 빅토리아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와 언니는 라틴어, 헬라어는 물론이고 지리, 작문 등 다양한 학문을 아버지에게 직접 배울 수 있었습니다.
나이팅게일은 청소년 시절부터 가난한 이들에게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1849년 이집트를 여행하던 중 알렉산드리아 병원을 방문해 정규 간호 교육 필요성을 절감하게 됩니다. 당시 간호는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직업이었습니다. 간호사에 대한 편견도 심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귀족 출신인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독일로 가 간호학을 공부했습니다. 1853년에는 런던 숙녀병원 간호부장으로 임명됩니다.
1853년 크림전쟁이 발발하자 나이팅게일은 잉글랜드 성공회 수녀들과 함께 야전 병원으로 향합니다. 단순히 환자를 간호하는 것을 넘어 유능한 행정가로서 관료주의에 갇힌 군부를 설득했습니다. 병원의 위생과 운영 체계도 혁신적으로 개선했습니다. 그 결과 환자 사망률은 42%에서 2%로 뚝 떨어졌습니다.
전쟁 후 영국으로 돌아온 나이팅게일은 군 병원에서 수집한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했습니다. 이를 통해 열악한 위생 환경과 비효율적 의료 시스템 때문에 생명을 잃었다는 걸 밝혀냈습니다. 그는 ‘나이팅게일 장미 도표’라는 시각화 도구를 만들었습니다. 이를 활용해 정치인과 고위 공직자를 설득해 병원 위생 개혁을 이끌었습니다. 그의 수학적이고 과학적인 접근 방식은 영국 병원 시스템을 혁신했습니다. 이는 공중보건 정책 수립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858년 나이팅게일은 여성 최초로 영국 왕립통계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나이팅게일은 간호학교 설립과 간호 전문 서적 출판에 앞장섰습니다. 수많은 병원과 간호시설의 개혁도 이끌었습니다. 이에 따라 간호사라는 직업은 전문 직종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1907년 여성 최초로 ‘메리트 훈장’을 받았습니다. 국제적십자위원회는 ‘나이팅게일상’을 제정해 그의 업적을 기렸습니다.
병상 앞에서 등불을 들고 있는 상징적 이미지뿐 아니라 과학과 통계로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나이팅게일. 그의 지성을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을 진정으로 기리는 길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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