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작품 ‘로크비 비너스’(비너스의 단장). 벨라스케스가 그린 누드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작품으로, 화가가 이탈리아에 머물렀던 1647∼1651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영국 내셔널갤러리 제공
비슷한 시기 이탈리아 화가가 그린 ‘비너스의 단장(일부)’. 스페인 프라도미술관 제공
김민 문화부 기자거품 속에서 태어난 아프로디테를 그린 보티첼리, 침대에 비스듬히 기댄 비너스를 표현한 티치아노, 시중드는 이들의 도움을 받아 꽃단장하는 루벤스의 비너스까지. 르네상스와 16세기 이탈리아 화가들이 그린 비너스(혹은 아프로디테)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유럽 여러 미술관의 중요한 컬렉션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들 ‘비너스 그림’은 표면적으로는 신화 속 여신을 묘사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당대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여성을 그립니다. 풍성한 금발을 늘어뜨리거나, 그리스 조각상 같은 신체 비율을 충실히 따르고, 더 나아가 누워있는 공간이나 장신구를 아주 호화롭게 묘사한 것이 흔합니다. 그런데 스페인 거장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남긴 그림 ‘로크비 비너스’의 비너스는 조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흐린 얼굴의 흑발 여인
간송미술관에 신윤복이 그린 ‘미인도’가 전시됐을 때, 이 그림을 보려고 긴 줄이 늘어섰던 것 기억하시나요? 이처럼 아름다운 여인은 누구에게나 호기심을 일으키는 소재입니다. 수백 년이 지나도 사람들이 그 그림을 직접 보겠다고 몇 시간을 기다리는 수고를 감수하는 건 ‘조선 시대 미인은 얼마나 예뻤나?’ 하는 궁금증 때문이 아닐까요. 그리고 그림을 보러 가서 여인의 얼굴, 옷, 장신구 같은 외모를 감상하죠.
그런데 벨라스케스의 그림 속 여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건 뒷모습이 전부입니다. 목걸이도, 팔찌도, 장식이 될 만한 어떠한 것도 걸치지 않은 누드에, 옆으로 누운 침대에도 흰 시트 위에 어떠한 무늬도 없는, 그저 푸른빛이 도는 회색 천이 놓여 있죠. 게다가 여인의 머리 위 공간은 텅 빈 벽이며 그 위로는 붉은 커튼이 드리워져 이 공간이 화려한 궁궐인지 귀족의 저택인지, 아니면 그냥 평범한 사람의 집인지 가늠할 수가 없습니다. 당대 대부분 화가가 비너스를 금발로 그린 반면 벨라스케스의 여인은 갈색빛이 도는 흑발을 하고 있습니다.
즉, 화가는 아름다운 여인을 신화나 환상 속에서만 볼 수 있는 이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검은 머리카락을 하고 아주 사적인 공간에 누워 있는 현실 속 여인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여인을 ‘아름답다’고 느끼고 시선을 빼앗기는데요. 그러한 매력을 만드는 결정적 장치는 바로 ‘거울’입니다.
나를 보는 여인이 아름답다
그림에서 거울이 없다고 상상해 볼까요? 여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 낯설고 다가가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날개를 단 소년(천사)이 든 거울 속에 비친 여인의 얼굴은 희미하지만 미소를 짓고 있고, 또 관객과 눈을 맞추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바로 여인이 ‘눈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거울을 들고 있는 비너스는 대부분 자기 얼굴이 얼마나 예쁜지 확인하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이와 달리 벨라스케스는 실제 각도로는 불가능함에도 여인의 시선을 과감하게 정면으로 돌립니다. 그 결과 보는 사람은 여인과 눈을 마주치며 교감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또 거울 속 여인의 이목구비는 아주 흐리게 표현했습니다. 여인의 몸은 붓 터치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희고 반짝이게 그려 현실감을 더한 것과는 반대로 말이죠. 얼굴이 희미해서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고, 그 불확실함 덕분에 보는 사람은 특정 인물이 아닌 나와 눈을 마주치는 ‘누군가’를 상상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까 아름다움이란 예쁘게 생긴 외모가 아니라 나와 닿을 수 있는 살갗이며, 뒷모습이 아니라 나를 보는 눈빛이라는 걸 이 그림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눈을 마주쳤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비너스)이 되었다.’
사적 취미에서 공공 자산으로
벨라스케스는 어떻게 이런 아름다움을 표현하게 됐을까요? 모든 것은 베일에 싸여 있습니다. 작품의 제목인 ‘로크비 비너스’는 영국 내셔널갤러리 소장품이 되기 전 그림이 걸려 있던 저택의 이름 ‘로크비 파크’에서 따온 것입니다. 그 전엔 150여 년간 스페인 귀족들이 소장했고, 첫 거래 기록은 마드리드 딜러 도밍고 게라 코로넬입니다. 코로넬은 왕실 그림을 거래하던 유명한 상인이 아니라 아주 작은 규모의 미술상이었고, 이때까지 그림 이름은 ‘누드 여인(A nude woman)’이었습니다.
그림이 이렇게 조용히 떠돌았던 이유는 당시 스페인 사회에서 누드를 그리는 것을 종교적 이유로 금지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무척 내밀한 분위기 때문에 벨라스케스가 이탈리아에서 몰래 만난 연인을 그렸다는 추측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과거엔 소수만 즐겼던 사랑의 언어를 지금은 미술관에서 무료로 누구나 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엔 걸작에 대한 시민들의 애정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1905년 그림의 소유주는 재정난으로 그림을 팔기로 합니다. 딜러가 책정한 금액은 4만 파운드. 내셔널갤러리의 1년 예산은 당시 5000파운드에 불과했습니다. 이에 ‘국보급 문화재’를 다른 나라에 빼앗길 수 없다는 여론이 일었고, ‘내셔널 아트 펀드’ 모금 운동으로 정부가 작품을 매입할 수 있게 됐죠. 이후 국왕이 익명으로 8000파운드를 기부했다는 소식까지 알려지면서, 이 작품은 내셔널갤러리에서 국민적 사랑을 받는 대표작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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