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론/유명순]‘기본’에 대한 믿음 흔들릴 때, 울분 사회 경고음 울린다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5월 15일 23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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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절반 이상 ‘장기적 울분 상태’에 있어
공정 부정되고, 정치-행정 부패할 때 울분
기본 지키려는 전 사회적 노력 병행될 때
개인 정신건강도 지켜진다는 교훈 얻어야

유명순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
유명순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
얼핏 보면 정신건강은 정신질환이나 장애가 없으면 그만인 것 같지만, 자신의 정신건강을 주제로 잠시만 얘기를 나눠 보면 이런 기준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금세 깨닫게 된다. 국제 보건기구들도 정신건강을 단순히 정신질환의 유무로만 판단하지 않고 개인과 집단의 감정, 심리 상태를 모두 아우르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문제는 정신 역시 신체처럼 어디가 크게 고장 나기 전까지는 관리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필자가 참여한 서울대 보건대학원 연구진은 2018년부터 여러 차례 전국 성인을 대상으로 주요 감정과 스트레스 상태를 조사해 왔는데, 그 결과는 우려할 만했다. 우선 올해 조사에서 응답자의 54.9%가 중간 또는 그 이상의 심한 울분 감정 상태로 나타났다. 이는 지난해 6월 조사보다 5.7%포인트 높아진 수치다. 그보다 더 주목해야 할 점은 2018년부터 지속한 5차례 조사 결과의 평균을 내보니 울분 고통이 지속되는 ‘장기적 울분 상태’가 전체의 절반을 넘어섰다는 사실이다.

울분은 법적 다툼이나 가족, 주변 사람, 공권력 등과의 갈등에서 몹시 부당하다고 느끼고, ‘세상의 기본’으로 믿었던 신념이 부정당하는 상황을 경험할 때 촉발되는 반응성 감정이다. 이러한 울분은 우리 사회에서 왜 이토록 강하게 감지되는가. 조사 결과는 이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조사에서는 울분을 측정하는 문항 19개가 포함됐는데, 매 조사마다 ‘내가 볼 때 크게 정의에 어긋나고 불공정한 일’을 경험한 수준이 다른 문항들보다 높게 나타났다. 특히 올해 조사에서는 ‘자꾸 반복적으로 생각나는 일’, ‘생각할 때마다 아주 많이 화가 나는 일’을 경험했다는 응답 비율이 ‘날 위축시키고 무기력해진다’는 응답보다 더 높게 나타났다. 또한 ‘이 세상이 공정한가’, ‘이 세상은 나와 관련된 중요 결정에서 나를 공정하게 대하는가’ 등의 질문에 과반수가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세상의 공정성에 대한 믿음은 울분 수준과 유의미한 상관관계를 보였으며, 공정 세계에 대한 신념이 낮을수록 울분의 수준이 높게 나타났다.

조사에서 제시된 16개 사회 불공정 사안 중 울분을 가장 크게 유발한 상위 3개 항목은 ‘입법·사법·행정의 비리나 잘못 은폐’, ‘정치·정당의 부도덕과 부패’ 등 국가와 정치 영역의 문제였다. 지난해 조사부터는 ‘안전관리 부실로 초래된 (의료, 환경, 사회) 참사’ 역시 울분을 유발하는 주요 사안으로 부상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조사에서 드러난 우리 사회의 울분 수준은 이 감정이 장애나 질환이 되는 지경에 이르기 전에 사회적 반응성을 높여야 한다는 경고등과 같다. 그렇다면 울분에 대한 사회의 반응성을 어떻게 높일 것인가.

우선 정신건강 관련 제도의 접근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 이번 조사 결과, 정신건강 위기 경험자의 절반 이상이 그 상황에서 아무런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또 울분과 우울 수준이 높은 집단의 절반 이상이 국가에서 제공하는 정신건강 서비스를 이용해본 적이 없었다. 이는 정작 긴급하게 서비스가 필요한 이들이 제도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고위험 집단이 제도의 바깥에 머무르지 않도록 정신건강 서비스의 전달 체계를 대폭 강화하고, 스스로 도움을 찾지 못하게 만드는 사회적 낙인도 반드시 개선해야 한다.

또한 울분이 부정적 스트레스에 대한 반응성 감정임을 고려할 때 주목할 부분이 있다. 지난해 조사에서 건강에 영향을 줄 정도로 심각한 스트레스를 경험했다고 답한 응답자들은 스트레스 유발 요인으로 개인이나 관계 차원뿐 아니라 정치·사회 환경 요인을 비중 있게 꼽았다. 따라서 울분에 대한 사회의 반응성을 높이려면, 사람들이 ‘세상의 기본’이라 여기는 신념을 소중히 여기고 그 수준을 지켜 나가는 사회적 노력이 병행돼야 한다.

이러한 사회적 노력이 더해질 때라야 울분 연구진이 제안하는 ‘지혜 요법(wisdom therapy)’, 즉 평소 감정을 현명하게 다루는 역량을 기르고 세상의 정의와 공정을 지나치게 기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전문가와 상담하고 대화를 나누는 등의 개인적 노력이 활발해지고 실효성을 거둘 수 있다.

6·3 대선을 앞두고 거대 공약들이 잇따라 발표되고 있다. 각 후보마다 그 명명은 달라도 경제를 살리고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방향성에는 차이가 없다. 그러나 이런 큰 뜻을 실현해 나가려면 사회 구성원들의 정신건강이 튼튼한 토대가 돼야 한다. 사람들의 건강한 감정과 심리 상태는 갈등이나 대립 상황이 초래하는 스트레스에 적절히 대처하도록 돕는다. 이 점을 국가 지도자가 잊지 않기를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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