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 국제 신용평가기관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미국 신용등급을 떨어뜨렸다. 달러를 찍어내는 기축통화국의 신용등급을 떨어뜨린 충격은 바다 건너 한국 금융시장까지 강타했다. 당시 취재차 찾은 서울 여의도 대우증권(현 미래에셋증권) 트레이딩 센터에는 무거운 정적과 한숨만이 가득했다. 모든 주식 종목이 하향 곡선을 그리며 추락하고 있었고, 트레이더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굳어 있었다.
다행히 이달 16일(현지 시간) 무디스가 미국의 신용등급을 ‘Aaa’에서 ‘Aa1’으로 한 계단 떨어뜨렸을 때는 14년 전과 같은 급작스러운 충격과 공포는 없었다. 이미 2번의 신용등급 강등을 겪은 데다 예고됐던 이벤트라는 점에서 후폭풍 없이 무난히 지나가는 듯했다.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은 신용등급 강등과 관련해 18일 “누가 신경이나 쓰겠나. 카타르는 신경 쓰지 않는다. 사우디아라비아나 아랍에미리트도 마찬가지”라며 “그들은 (미국에) 돈을 밀어넣고 있다”고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그때까진 좋았다. 단 며칠의 시차가 있었을 뿐, 국채 시장은 무디스발 ‘부채 공포’를 그냥 넘기지 않았다. 신용등급 강등 이후 미국 국채 수요가 흔들리는 것 같더니,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추진하는 대규모 감세안에 대한 불안까지 겹치자 국채 시장은 인내심을 잃고 ‘발작’을 일으켰다. 21일 미 재무부가 입찰한 20년 만기 국채 금리가 5%를 넘었다. 10년물 국채 금리도 4.6%대로 급등(국채 가격은 급락)했다. 천문학적 부채에 짓눌린 미 경제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자 채권 투자자들은 미 국채를 내던졌다. 일본, 영국, 독일 등에서도 재정적자가 투자자들의 불안 심리를 자극하며 국채 금리가 동시다발적으로 급등했다.
유동성이 넘쳐나는 채권시장에서, 그것도 최고의 안전자산이라 여겨지던 미국 국채와 일본 국채가 동시에 휘청거리는 건 이례적이다. ‘채권자경단(bond vigilantes)’으로 불리는 시장이 각국의 재정 건전성에 ‘옐로카드’를 꺼낸 것이라는 해석까지 나왔다. ‘헤지펀드의 대부’로 불리는 투자자 레이 달리오는 “우리는 국채시장에 대해 두려움을 가져야 한다”며 “마치 의사가 환자를 진단하듯 이 상황을 바라볼 때, 누적된 부채가 매우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판단된다”고 덧붙였다.
문제는 우리 정부도 부채 공포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다는 점이다. 지난해 나라살림을 보여주는 관리재정수지는 104조8000억 원 적자였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 부채비율은 11개 비기축통화국 가운데 4위였다. 당장은 한국의 재정 건전성이 다른 나라보다 양호하더라도 이 추세로 빚이 늘면 국채 금리가 충격을 받는 등 어려운 시기가 올 수 있다.
게다가 시장금리는 대부분 국채 금리와 연동돼 있고, 국채 금리가 오르면 회사채 금리도 오를 수밖에 없다. 결국 금리 급등으로 가계와 기업의 이자 비용이 증가하고 소비와 투자까지 위축되는 위기가 올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번 국채 쇼크는 세계 최대 경제 대국이자 기축통화국인 미국마저도 눈덩이 재정적자 탓에 시장의 신뢰를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줬다. 우리 경제를 짓누르는 ‘빚’의 무게를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누적된 빚 앞에는 장사가 없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