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련 칼럼]‘완벽한 이력서’ 정치 엘리트가 던진 질문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5월 27일 23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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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3시 후보 교체에 “안 된다” 한마디 없고
1인자 방탄 위해 사법부 압박해도 침묵하고
미래 대통령감 아닌 ‘무난한 인재’ 공천한 결과
정치 위기는 핵심 지도자 못 찾아 자초한 일

김승련 논설위원
김승련 논설위원
한덕수 전 대통령 권한대행이 공개 활동을 중단했다. 26일 비공개 소환조사를 받았고, 출국금지됐다는 정도만 보도됐다. 그가 카메라에 포착된 것은 일주일 전 하버드대 한국 동창회에 참석한 일이다. 한때 몸담았던 뜨거운 대선 국면에 비춰볼 때 한가한 일정이었다. 한 전 대행은 5월 초 사퇴 담화문에서 “고뇌 끝에, 이 길밖에 없다면 가겠다”며 결기를 보였다. 정치와 국정을 바꾸겠다는 선언이었는데, 단일화 소동 끝에 후보가 안 됐다면서 뒤로 빠졌다. 완벽한 이력서를 자랑하는 그의 50년 공직은 이해 못 할 선택들로 마지막 장이 채워지고 있다.

한 전 대행뿐만 아니라 국민의힘을 이끌던 비대위원장, 원내대표, 다선 중진, ‘윤핵관’들도 경력으로 치면 부러워할 게 많다. 거의 예외 없이 최고의 대학을 나오고, 고시에 붙거나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땄다.

계엄의 밤 이후 모든 게 달라졌다. 이들은 “계엄은 잘못”이라는 쉬운 답을 못 찾았고, 부적격 대통령 탄핵에 반대했고, 새벽 3시의 후보 바꿔치기를 두고 “이건 아니다”란 한마디가 없었다. 유권자들은 고위직이 주는 무게감을 믿었고, 필요할 때 제 몫을 해 줄 것을 기대했다. 평소엔 가려진 것들이 위기의 순간에 문득 드러나곤 한다. 경력에 걸맞은 실력을 논하기에 앞서, 보통 사람들의 상식과 동떨어져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더불어민주당이라고 다를 게 없다. 요새 민주당에는 전통적으로 국민의힘이 추구하는 ‘스펙 인재’가 늘어났지만 본주류는 운동권과 시민단체 출신이다. 이들은 선후배 인연을 바탕으로 당의 중심을 차지했다. 자폭한 보수 정치에 반사이익을 얻어 선수(選數)를 쌓았지만 국회를 운영하는 모습에서 우리를 미래로 이끌 것인지에 대한 회의감이 크다. 이들의 이력서는 세속적 눈으론 화려하지 않을 수 있지만 운동가의 관점에선 모자람이 없는 이들이 많다.

소리(小利)를 버리고 학생운동과 시민사회로 나섰으니 정의감을 기대하는 건 자연스럽다. 그럼에도 지난 몇 년간은 정의와 양심보다는 충성심이 더 부각된 시기였다. 지난 1개월만 봐도 그렇다. 민주당은 대법원장 탄핵, 특검, 청문회를 거론했다. 4심제를 도모했고, 대법관 수를 30명, 100명으로 늘리겠다고 나섰다. 사법부를 이렇게 거칠게 다룬 정당은 1987년 체제에선 없었다.

대중의 뇌리에서 잊혀졌지만 민주당은 당헌도 맞춤형으로 고쳤다. 대선 1년 전에 당 대표는 사퇴해야 한다는 조항도, 기소되면 당직을 맡을 수 없다는 조항도 지워 버렸다. 1인자의 대선 가도를 위한 조치였다. ‘양심세력’이 많다는 정당에서 “이건 아니다”란 반론이 거의 들리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던 걸까. 국회의원이나 정부 고위직에 오른 이들에게서, 거창하게 표현하자면 역사적 책임을 진다는 의식이 약해진 탓일까. 뭐가 맞는지 한마디로 정의하긴 어렵다. 다만 편협한 공천이 남긴 악영향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 2002년 민주당 대선 경선이 흥행을 거둔 뒤 2007년 이후 불붙은 경선 전쟁과 궤를 같이하는 일이다.

경선 확대는 정당 민주화의 한 형태였지만, 그 바람에 국회의원 공천은 공천권을 쥔 1인자가 ‘내 사람’을 찾는 과정처럼 돼 버렸다. 당심과 민심을 얻어 대선 후보가 되려면 현역 의원 몇 명의 지지를 얻느냐가 중요해졌다. 결국 큰 정치를 하겠다며 당돌하게 덤벼드는 미래의 당 대표감, 대선 후보감이 공천받는 일이 거대 정당일수록 크게 줄었다. 그 대신 우수하지만 무난하고 충직한 인재들이 공천을 받아 계파원이 되는 경우가 늘었다. 오른쪽 정당은 모범생을 찾았고, 왼쪽 정당은 운동권 경력이 강조됐다.

그 결과, 소장파 모임이 실종됐다. 과거엔 당 주류에게 반론을 펴는 초·재선 ‘당내 야당’이 있었다. 요즘엔 국민의힘 상당수 초선들은 대통령 뜻을 따라 연판장을 돌리는 행동대가 됐다. 민주당 초선 중 개딸 집단의 뭇매를 감당하겠다는 이들은 찾기 어렵다. 당내 민주화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서 이견을 용납 않는 ‘한목소리’가 강화된 것이다. 이러니 당 지도부가 긴장감이 떨어진 가운데 엉뚱한 선택, 황당한 행동에 별 부담 없이 나서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답을 찾아야 할 질문이 남아 있다. 누가 정치를 해야 하는가. 그 인재를 어떻게 찾아낼 것인가. 리더가 건강한 선택을 내릴 당내 문화는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가. 계엄과 탄핵, 무너지는 당내 민주주의로 지금의 정치가 흔들리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 밑바탕에는 사람의 빈곤, 특히 핵심 리더의 부재가 존재한다.

#한덕수#정치#국민의힘#더불어민주당#공천#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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