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 머슴, 술친구, 아이돌, 전문가… 투표장에서 누굴 뽑는 것인가[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6월 1일 2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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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투표장에 가면서 생각할 것들
고려-조선에도 고위관직자 뽑아… 다스려줄 이 뽑아 올려 모신 역사
50년대까지 민주 권리 행사보다… ‘모실 사람’ 뽑는다는 인식 혼재
표현은 그 시대 민주주의의 거울… ‘뭘 뽑아야 현대선거인가’ 물어야

《한국 역사상 최초의 보통·직접선거는 1948년 5·10 총선거다. 948명이 출마해서 임기 2년의 제헌국회의원 200명이 선출됐다. 이 선거의 투표율은 얼마였을까? 총 유권자 813만2517명 중 96.4%에 해당하는 784만871명이 선거인 명부에 등재됐고, 놀랍게도 등록자의 95.5%가 투표에 참여했다. 특별한 사정이 있는 사람을 빼고는 거의 다 투표장에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일단 정부가 유권자 총수를 면밀히 파악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조선시대에는 오늘날 상상할 수 있는 인구통계 같은 것은 없었다. 그 당시 호구조사는 부과할 세금을 미리 정해 놓고 그에 맞춰 장부를 만드는 식이었다. 따라서 조선시대 호적만 가지고 전체 인구가 얼마였는지 알아낼 방법은 없다. 현대적 인구조사는 불완전하나마 식민지 시기에 최초로 시행됐다. 1948년 총선거는 20세기 내내 확장돼 온 정부의 대민 통제력을 바탕으로 시행될 수 있었다.

정부의 유권자 파악 능력 이상으로 놀라운 것은 한국인들이 선거에 열렬히 임했다는 사실이다. 선거라는 것이 아주 낯설었거나 정치 참여 의지가 박약했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식민지 상황에서 벗어났으니 마침내 자기 손으로 자기 나라를 건설하고 싶었으리라. 1948년 전북 김제을 선거구에 출마한 최윤호 후보를 추천하는 글에는 “애국동지는 동심동력으로 총궐기하여 존중한 일표로서 조국 재건의 열렬한 정신을 표현하시기 바라나이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선거란 ‘궐기’란 말을 쓸 정도로 떨쳐 일어나는 일이자, 조국을 재건하는 일이었다.

최초로 시행되는 선거제도에 국민들이 저토록 잘 적응했다는 사실도 놀랍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직접민주주의를 하라고 했으면 훨씬 더 당황했을 것이다. (투표 아닌 방법으로) 고위 관직자를 선발하는 광의의 ‘선거’제도는 한국인에게 낯선 것만은 아니었다. 아니 그러면 조선시대에도 선거가 있었던 말인가? 그렇다, 있긴 있었다.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에도 존재했다. 조선 초 편찬된 ‘고려사’에는 선거지(選擧志)가 포함돼 있는데, 이때 말하는 선거가 바로 그 선거다.

이 전통적 선거란 무엇인가. ‘선’은 뽑는다는 뜻이고, ‘거’는 들어 올린다는 뜻이다. 즉, 선거란 말 그대로 뽑아 올린다는 의미다. ‘선’의 의미는 다른 단어에도 살아 있다. 선발, 선출, 선정과 같은 단어에 쓰인 ‘선’은 모두 뽑는다는 뜻이다. 천거, 과거, 거인과 같은 단어에 쓰인 ‘거’는 모두 들어 올린다는 뜻이다. 천거란 추천을 통해 올린다는 뜻이고, 과거시험이란 과목별로 뽑아 올린다는 뜻이고, 거인이란 명나라 때 향시에 합격한 사람의 명칭이었다.

이처럼 다스려줄 사람을 뽑아 올리는 제도는 그만큼 한국사에서 오래됐다. 오래된 만큼 익숙한 일이었다. 익숙한 일이니 잘 적응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만 1948년 총선거는 일반 사람들이 투표에 참여하는 보통·직접선거였다는 점이 다르다. 1940, 50년대의 선거에는 전통적 선거와 현대적 선거의 양상이 모두 나타난다. 1956년 광주 투표장에 온 사람들을 찍은 사진을 보자.

어떤 사람을 뽑는 것이 현대의 선거인가. 1956년 대선 당시 광주의 한 투표소 풍경. ‘협심하여 또 모시자!’란 표현이 눈에 띈다. 국가기록원 제공
어떤 사람을 뽑는 것이 현대의 선거인가. 1956년 대선 당시 광주의 한 투표소 풍경. ‘협심하여 또 모시자!’란 표현이 눈에 띈다. 국가기록원 제공
이 사진은 여러모로 흥미롭다. 정치로부터 배제돼 있던 일반 여성들이 참정권을 행사한다는 점, 그럼에도 뽑을 대상으로는 늙은 남자 둘이 제시돼 있다는 점, 그리고 ‘속지 말고 바로 뽑자’는 표현이 선거 과정에 나타나는 협잡을 상기시킨다는 점이 그렇다. 더 흥미로운 것은 ‘합심하여 또 모시자’라는 표현이다. 모시다니, 누구를 모신단 말인가. 선거가 떠받들고 모실 사람을 뽑는 일이었던가. 전통적 선거는 확실히 그랬다. 1956년의 유권자 상당수는 자신들을 모셔줄 사람을 뽑는 게 아니라 자신들이 모실 사람을 뽑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기 손으로 뽑는다고 그것이 곧 민주주의는 아니다. 왕이나 상전을 뽑는 일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선거로 왕을 뽑았다면 탄핵은 반정이요, 폐위에 불과할 뿐 민주주의는 아니다.

1963년 대선에서 민주공화당 박정희 후보의 유세 장면으로, 현수막에서 후보를 ‘새 일꾼’으로 칭했다. 국가기록원 제공
1963년 대선에서 민주공화당 박정희 후보의 유세 장면으로, 현수막에서 후보를 ‘새 일꾼’으로 칭했다. 국가기록원 제공
한국 선거에는 한동안 ‘받들어 모시자’ ‘받들자’ ‘나라와 겨레의 어버이’ ‘국부’ ‘민족의 영도자’라는 표현이 넘쳐났다. 다행히도 그 같은 표현들은 점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1963년도 대선에는 민주공화당 박정희 후보를 ‘새 일꾼’이라고 칭하는 표현이 등장한다. ‘새 일꾼에 한 표 주어 황소같이 부려보자!’

1989년 대선 당시 민정당 노태우 후보가 표방한 ‘보통사람’ 슬로건. 국가기록원 제공
1989년 대선 당시 민정당 노태우 후보가 표방한 ‘보통사람’ 슬로건. 국가기록원 제공
받들어야 할 ‘어버이’보다는 부려야 할 ‘일꾼’이 민주주의에 가까워 보인다. 이처럼 한때 일꾼을 자처했던 박정희도 권위주의의 길을 갔고, 박정희 사후에 군사정권이 다시 들어섰다. 국민들의 격렬한 직선제 투쟁 끝에 대통령을 직선으로 뽑게 되자, 전직 군인 노태우 후보는 ‘보통사람’이란 구호를 들고 나왔다. 이 보통사람이란 구호에는 나를 억압적인 군인이 아니라 일상을 같이 할 보통 민간인으로 봐달라는 희망이 들어 있었다.

그 이후의 선거에도 ‘도구’ ‘머슴’ 등 다양한 표현이 선거 홍보물에 등장했다. 그 표현들은 그 시대 민주주의 상태를 반영하는 거울이었다. 투표장에 가서 한 표를 행사하는 것만으로는 민주주의가 완성되지 않는다. 물어야 한다. 어떤 사람을 뽑는 것이 현대의 선거인가. 왕을 뽑는 것인가, 받들어 모실 어버이를 뽑는 것인가, 부릴 머슴을 뽑는 것인가, 보통 사람을 뽑는 것인가, 사용할 도구를 뽑는 것인가, 술친구를 뽑는 것인가, 추종할 아이돌을 뽑는 것인가, 믿고 의지할 현자를 뽑는 것인가, 일을 맡길 전문가를 뽑는 것인가.

#선거제도#투표#민주주의#현대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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