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벼랑 끝에 몰린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을 지원하기 위해 30조 원 규모의 ‘슈퍼 추경’을 발표하고 전 국민에게 1인당 최대 50만 원의 지원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단기적으로 소비가 늘어 돈이 돌면 침체된 경기가 나아질 것으로 본 것이다. ‘민생회복 소비쿠폰’이 영양실조 상태인 가계에 보약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체질을 고치지 않는다면 증상을 잠시 완화하는 대증요법에 그칠 수밖에 없다.
추경만큼이나 급한 것이 한계산업의 구조 개혁이다. 썩은 부위를 도려내고 건강한 새살이 돋게 하지 않으면 우리 경제는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한다. ‘철의 도시’로 불린 경북 포항의 포스코 1선재공장이 45년 만에 멈춰 섰다. 전남 여수 석유화학 산단의 굴뚝에선 연기가 사라진 지 오래다. 중국의 무차별적인 저가 공세, 미국의 보호무역과 관세 장벽, 그리고 고비용 구조로 인한 국제 경쟁력 약화가 한꺼번에 덮치면서 철강, 석유화학 등 우리 경제를 떠받쳐 온 제조업의 근간(根幹)이 무너지고 있다.
지금의 위기를 단순한 ‘다운 사이클’(침체기)로 치부해선 안 된다. 기술 생태계와 생산 인프라가 송두리째 붕괴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다. 한번 사라진 뿌리 산업을 되살리긴 어렵다. 미국이 고율의 관세를 무기로 뒤늦게 제조업 부활을 꿈꾸고 있지만 이미 늙어버린 노동력과 열악한 인프라로 인해 과거의 영광을 되찾지 못할 공산이 크다.
국제 통상 질서가 국가 주도로 바뀌고 경쟁국들이 자국 산업에 대한 파격 지원에 나서고 있다. 이런 글로벌 산업 정책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 채 한국은 계엄과 탄핵이라는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잃어버린 6개월’을 보냈다. 지금부터라도 정부가 믿음직한 ‘집도의’가 돼야 한다.
때마침 산업 재편의 신호탄이 잇따르고 있다. 최근 여당이 석유화학 특별법을 발의했고, HD현대그룹과 롯데케미칼의 빅딜이 가시화되고 있다. 그러나 대규모 설비 산업의 특성상 자율 구조조정이 쉽지 않다. 정부와 정책금융기관은 단순히 돈을 푸는 것에 그치지 않고, 민간이 비효율적 자산을 과감히 도려내고 경쟁력 있는 핵심 자산을 살려낼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
구조 개혁은 과감하면서 동시에 섬세해야 한다. 단순히 설비를 줄이는 데 그치지 않고 핵심 기술과 인재의 끈을 잇고, 전후방 산업 생태계를 함께 재편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공지능(AI)과 배터리 등 첨단 산업도 여전히 ‘철’과 ‘화학’이라는 토대 위에 있다. 스마트공장도 철강 없이 세워지지 않고, 전고체 배터리도 석유화학 기술의 진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산업 재편이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 자동차와 반도체, 해운 등 과거 정부가 주도했던 빅딜 실패의 트라우마가 여전히 남아 있다. 행정부 내에도 큰 그림을 그리고 과감하게 산업 정책을 수행할 만한 구조조정 전문가가 부족한 실정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후보 시절 한계산업 구조 전환을 국가가 지원하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이제 그 약속을 실행에 옮겨야 한다. 가계에 주는 지원금과는 달리 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구조개혁에는 고통과 저항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예리한 감각으로 산업의 맥을 짚고, 한국 경제를 다시 뛰게 할 수 있는 리더십을 보여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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