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서영아]‘내 인생 마지막은 내가 정한다’의 함정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7월 2일 23시 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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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아 콘텐츠기획본부 기자·국장급
서영아 콘텐츠기획본부 기자·국장급
지난달 본보 ‘100세 카페’ 지면에 소개한 강릉 갈바리의원 호스피스 기사에 붙은 댓글들을 보며 처연한 마음이 들었다. 기사는 60년간 이곳에서 생의 마지막을 맞는 환자들의 존엄한 임종을 도와주는 수녀들과 의료진 이야기를 전했는데, 댓글들은 ‘호스피스도 좋지만 안락사할 권리, 즉 자신이 원할 때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허용해 달라’는 내용으로 가득했다.

초고령사회가 가져다주는 불안감 때문일까. 노년의 가난이나 질병, 인지장애(치매), 고독 등이 거론될 때마다 독자 반응은 ‘편안하게 죽을 권리를 보장하라’는 주장으로 귀결된다. 유튜브나 다른 대중 매체에서도 자발적 안락사, 혹은 조력 존엄사에 긍정적인 오피니언 리더들을 만날 수 있다. 존엄사가 초고령사회의 비상구나 도피처라도 된 것 같다.

존엄사 허용 국가 갈수록 늘어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존엄사를 합법화한 나라는 2002년 네덜란드를 필두로 벨기에 룩셈부르크 스위스 캐나다 미국(일부 주) 호주 뉴질랜드 스페인 독일 등 부쩍 늘고 있다. 인간의 권리 의식이 발전하고 제2차 세계대전 후 한꺼번에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가 나이 먹어 가는 현실과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호주의 경우 극적인 반전을 보였다. 104세 식물학자 데이비드 구달 박사가 스위스로 향한 2018년만 해도 안락사는 법으로 금지돼 있었다. 구달 박사는 100세 넘어서도 연구 활동을 지속했지만 집에서 쓰러진 뒤 혼자 생활하는 게 힘들어지자 “삶의 질 악화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존엄한 죽음을 택하겠다”며 실행에 옮겼다. 호주 전체가 찬반양론으로 들끓었지만 그 뒤 ‘존엄사법’이 호주 모든 주로 퍼져 나갔다.

올 3월에는 2002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대니얼 카너먼 교수의 1년 전 부고가 존엄사로 인한 것이었다고 뒤늦게 알려졌다. 행동경제학 창시자인 카너먼 교수는 “나는 과거부터 인생의 마지막 몇 년간 치를 고통과 수모는 불필요하다고 믿어 왔고, 그 믿음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며 “행복할 수 있을 때 떠난다”고 가족에게 작별 인사를 남겼다.

한국에서 안락사는 불법이지만 여론의 변화 속도를 보면 언제 허용해도 이상하지 않겠다는 생각도 든다. 몇몇 여론조사 결과는 80% 이상 찬성률을 나타낸다. 저출산 고령화 인구구조에서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길이 될 수도 있다.

다만 아무리 존엄한 죽음이 ‘현대인의 권리’라지만 너무 손쉽게 내려지는 답안에는 삶의 본질적인 무언가가 빠져 있다는 우려를 지울 수가 없다. 예컨대 일본 영화 ‘플랜 75’에서 엿보이는 세상. 국가 정책으로 75세 이상이 되면 안락사를 신청할 수 있게 한 제도가 가져올 디스토피아를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80세 정도 된 노인을 보면 “저분은 왜 아직 살아 계신가?”라며 눈치를 주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의사결정 단계부터 사회적 압력이 개입될 가능성이나 이런저런 범죄가 연관될 가능성도 따져 봐야 한다.

한국에서도 조력 존엄사가 허용된다면

무엇보다 당사자로서 너무 쉬운 도피처가 생긴다면 삶의 무게와 가치가 달라져 버리는 건 아닐까 걱정된다. 성실한 삶, 운명과 인연에 대한 수용, 세상 및 이웃과의 유대 같은 여러 덕목이 경시될 수 있다는 생각은 기우일까. 생자필멸의 인간 숙명이랄지 예술과 종교의 모티브가 되는, 인류가 고통 속에서 꽃피워 온 삶의 가치들은 손쉬운 비상구 앞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100세인(人) 연구 선구자 전남대 박상철 석좌교수가 주창하는 ‘나이 드는 것은 거룩한 것(Holy Aging)’이란 가설을 떠올리게 된다. 노화 현상을 세포 단위로 연구하던 박 교수는 늙은 세포가 생존을 위해 성장을 거부하고 노화를 선택했음을 발견했다. 그 세포가 계속 성장을 고수했다면 생존할 수 없었다는 것. 그는 수십 년째 진행 중인 100세인 연구에 대해서도 “간난신고 속에서도 생명을 지켜 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이들의 모습은 ‘숭고하다’는 말 외에 표현할 길이 없더라”라고 했다.

#호스피스#안락사#초고령사회#노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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