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갑 갤러리 클립 대표·‘건축가가 지은 집’ 저자우리 집 가훈은 ‘여행’이다. 집은 번뇌의 장소. 때로 한 번씩 떠나야 한다. 지난 주 잡지 ‘행복이 가득한 집’에서 주관한 오픈하우스 프로젝트 ‘2025 행복작당: 부산’ 편을 즐기고 왔다. 그간 서울 종로구 북촌과 서촌 일대의 아름다운 집과 상공간을 산책 및 탐방 코스로 묶어 소개했는데, 이번에는 부산을 아지트로 삼았다.
이런 기획은 일상에 단맛을 더하는 ‘종합선물세트’다. 솔솔 상쾌한 바람이 폐부 깊숙이 들어가는 여행길에는 미식도 있고 예술도 있다. 여러 라이프스타일 브랜드가 파트너로 참여해 함께 공간을 꾸민 덕분에 어떤 콘텐츠와 트렌드가 건물을 채우고 주목 받는지도 알 수 있다. 내가 어떤 회사의 사장이라면 직원들에게 행복작당만은 꼭 보고 오라고 권할 것이다.
부산역에 내려 달려간 곳은 버스로 두 정거장 거리에 있는 ‘오초량’이다. 일제강점기, 돈을 벌 목적으로 부산에 상륙한 일본 토목건축업자가 공들여 지은 2층집이 그곳에 있다. 평생 살 요량이었을까. 구석구석 온 정성을 다해 지었는데 일본의 2차 세계대전 패망과 함께 집주인은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남은 집을 태창기업 창업주가 인수해 오늘에 이르렀다.
일본식 목조주택에 한국의 문화와 손길이 깃든 집은 아름다우면서도 정겹다. 1, 2층에 큼직하게 뺀 도코도마(床の間·꽃꽂이나 붓글씨 족자를 감상하려고 마련한 작은 공간)를 비롯해 스르륵 부드럽게 열리는 격자무늬 창문, 환한 기운의 다다미방과 울창한 정원까지…. 쪽마루에 앉아 정원에 떠다니는 빛무리를 보고 있으면 조금 과장해 영원의 세계에 들어와 있는 듯하다. 이달 20일까지 이곳에선 도자 전시 ‘흙의 시간’이 열린다. 관상(觀賞)의 즐거움을 위해 한 점 한 점 주인공처럼 섬세하게 자리를 잡아 준 연출이 돋보였다.
초량동에서 버스를 타고 1시간 넘게 가면 부산 문화예술의 성지 ‘달맞이길’에 닿는다. 나무 그늘 드리워진 산책로를 따라 왼쪽으로는 잘생긴 건축물이, 오른쪽으로는 해운대 앞바다가 펼쳐진다. 도로 위로는 이따금 원색의 슈퍼카가 달린다. 조현화랑은 달맞이길에서 꼭 가봐야 하는 곳이다. 2007년 이곳에 둥지를 틀었는데 돌계단과 정원, 곡선으로 이어지는 원형 건물의 조화가 언제 봐도 이색적이다. 현재 관람객을 맞고 있는 전시는 설악의 꽃으로 유명한 김종학 화백의 드로잉전이다. 작가가 추상화 탐구에 매진하던 1960∼70년대 초기 작품까지 두루 볼 수 있어 관람 내내 화가의 뿌리와 만나는 기분이었다.
최근 달맞이길에는 또 하나의 근사한 복합문화공간이 생겼다. 독일어로 모퉁이란 뜻의 ‘에케(ECKE)’. 선물가게부터 파인다이닝까지 다양한 상공간이 4개 층에 걸쳐 들어섰는데 3, 4층을 빈티지 가구 브랜드 ‘원오디너리맨션’에서 운영하는 숙소로 꾸렸다. 여유롭게 숙박하며 건물 자체를 작은 동네처럼 즐기기에 좋다. 1층에 들어선 규동과 스키야키 식당 ‘오라스키’는 꼭 가봐야 하는 곳이다. ‘특별함을 모두에게’를 모토로 하는 로컬 커피 브랜드 ‘모모스’도 놓치기 아쉽다. 최고의 원두는 물론이고 오리지널 가구와 조명, 사진과 그림으로 업장을 채웠다. 일정표에 한 번씩 ‘부산행’이 기약돼 있다면 바쁜 일상에 숨통이 트일 듯하다. 그렇게 가는 부산 여행에 요긴한 정보가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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