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보시스템 오작동으로 들통난 전교 1등의 비밀[횡설수설/장원재]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7월 16일 23시 18분


코멘트
3년 동안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던 한 우등생의 ‘어두운’ 비밀이 경비 시스템 오작동 때문에 들통났다. 이달 4일 오전 1시쯤 경북 안동 A여고 교무실에서 무단 침입을 알리는 경보가 울렸다. 현장엔 아무도 없었지만, 확인 결과 한 퇴직 교사가 과거에 등록했던 지문을 찍고 건물 현관으로 들어온 것이 확인됐다. 이 교사는 이 학교 고3 학생의 엄마와 함께였는데, 목적은 기말고사 시험지를 훔쳐내는 것이었다고 한다. 교사는 기억하고 있는 교무실 비밀번호까지 정상 입력했지만, 시스템 오류로 경보가 잘못 울리는 바람에 덜미가 잡혔다.

▷이 교사는 5년 전 과외를 하며 학부모와 학생을 알게 됐다. 학생이 2023년 고교에 진학한 후에는 같은 학교에 기간제 국어 교사로 취업했고, 1학년 담임까지 맡았다. 경찰 수사에서 엄마는 교사에게 3년 동안 200만 원씩 10차례에 걸쳐 총 2000만 원을 송금한 것으로 드러났다. 엄마는 딸을 의대에 보내 의사인 남편의 뒤를 이으려는 생각에 시험지 유출을 의뢰한 것으로 경찰은 보고 있다. 대부분의 대학은 3학년 2학기 내신을 입시에 반영하지 않는다. 이 학생에겐 이번 기말고사가 마지막 고비였다.

▷2018년 ‘숙명여고의 시험지 빼돌리기 사태’ 이후 교육부는 전국 고교의 시험지 보관 시설에 폐쇄회로(CC)TV를 설치하고 출입을 통제하도록 했다. 하지만 A여고가 퇴직교사의 지문을 시스템에서 삭제하지 않은 것이 1차적 화근이었다. 공범도 있었다. 경찰 조사 결과, 이 교사는 지난해 초 퇴직 후 경기 지역 고교로 옮겼지만, 이후에도 시험 때마다 한밤중에 A여고를 찾았다. 교사와 학부모의 영상이 CCTV에도 찍혔다. 하지만 학교 시설 관리자가 출입을 막지 않고 영상까지 삭제해 준 것.

▷학생부 위주인 수시전형이 대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80%나 된다. 그만큼 고교 내신이 중요하다 보니 시험지 유출 사건은 끊이지 않는다. 지난해 10월에는 경기 성남시 분당에서 중간고사 시험지를 학원으로 유출한 기간제 교사가 검거됐다. 3년 전 광주에선 교사 컴퓨터에 해킹 프로그램을 설치해 화면을 캡처하는 방식으로 시험 문제와 답안을 빼돌린 학생 2명이 퇴학당했다.

▷엄마가 빼낸 시험 문제 덕에 줄곧 전교 1등을 지켰던 학생은 어떤 마음으로 매번 시험을 봤을까. 노력 없이 1등을 한 데 따른 죄책감, ‘거짓의 성’이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는 불안감, 자신 때문에 내신이 밀린 친구에 대한 죄책감은 없었을까. 엄마는 안 보는 곳에선 반칙을 해서라도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고 딸에게 가르쳤던 셈이다. 하지만 딸은 고교에서 받은 모든 성적을 ‘0점 처리’ 당하고 퇴학당했다. 비뚤어진 교육열이 딸의 인생을 망쳐놓고 말았다.

#시험지 유출#전교 1등#경비 시스템#퇴직 교사#부정행위#퇴학 처리
©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