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에서 약을 구매해 본 경험이 있다면 “왜 약이 이것밖에 없을까”라고 느꼈을 수 있다. 현재 한국 편의점에서 살 수 있는 약은 11개뿐이다. 처음엔 13개였는데 2022년 2개가 생산 중단되면서 줄어들었다. 편의점 구매 가능 약품은 ‘안전상비의약품’으로 불리며 제조사와 브랜드, 용량까지 정해져 있다. △소화제는 대웅제약의 베아제정(3정) △해열진통제는 삼일제약의 어린이부루펜시럽(80mL) △감기약은 동아제약의 판피린티정(3정) △파스는 신신제약의 신신파스아렉스(4매) 등이다. 만약 편의점에서 신신제약의 다른 파스인 ‘플렉스’를 달라고 요청한다면 받을 수 없다.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신신제약의 파스는 4매가 들어있는 신신파스아렉스뿐이기 때문이다. 파스에 무슨 큰 차이가 있길래, 이 파스는 되고 저 파스는 안 되는지 모를 일이다.
美 30만 개, 英 1500개 非약국서 판매
편의점 의약품 판매 제도는 2012년에 도입됐다. 주변에 약국이 없거나 약국이 쉬는 심야 시간대와 공휴일에도 의약품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였다. 다만 의약품 오남용에 따른 국민 건강 저해를 막기 위해 엄격한 법률적 제한 장치를 뒀다. 약사법에 안전상비의약품을 20개 품목 이내에서 지정하도록 한 것이다. 상황이 변하면 안전상비의약품 지정심의위원회를 열어 품목 확대 등을 논의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제도 도입 15년이 되도록 품목 확대는 한 번도 이뤄지지 않았다. 심지어 위원회는 2018년 이후 7년째 열리지 않고 있다.
연도별로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한국에서는 1년에 2000개 내외의 새 의약품이 허가 또는 신고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5년이면 3만 개 정도의 의약품이 새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의약품은 단 1개도 추가되지 않았다.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한국과 달리 미국에서는 30만 개, 영국은 1500개, 일본은 930개 이상의 의약품이 약국이 아닌 곳에서 판매된다. 안전성만 확인되면 약국 외 판매가 가능하도록 적극적으로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 국내 약사단체는 편의점 의약품 판매가 확대되면 오남용으로 국민 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줄 수 있다며 편의점 의약품 확대를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약사단체의 주장대로라면 미국, 영국, 일본은 정부가 국민들의 의약품 오남용을 조장하면서 국민 건강을 방치하고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안전상비의약품 품목 확대 불가피
한국편의점산업협회 조사에 따르면 편의점 전체 매출 가운데 의약품 매출 비중이 가장 높은 시간대는 밤 9시부터 새벽 1시다. 약국이 문을 닫았을 때 편의점에서 약을 많이 산다는 얘기다. 이 조사만으로도 아픈 사람들의 다급한 심정이나 고통이 느껴진다. 이런 사람들의 수는 계속 증가하고 있으며 편의점의 의약품 매출은 2015년 503억 원 수준에서 2023년에는 832억 원까지 올랐다.
이제 안전상비의약품 품목 확대를 막을 수 없어 보인다. 지사제, 제산제, 화상연고, 알레르기약 등 안전성이 검증된 약품은 과감하게 허용할 필요가 있다. 편의점에서 의약품을 판매한 지 15년이 지났지만 지금까지 오남용으로 인한 부작용 사례가 보고된 것이 없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물론 약사단체가 주장하는 오남용 문제는 반드시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이번 기회에 품목 확대를 넘어 완전한 패러다임 전환도 고민할 필요가 있다. 편의점에서 절대 판매하면 안 되는 약품만 정한 뒤 나머지는 모두 허용하는 네거티브 규제 방식이다. 미국, 일본, 영국 등은 이미 이 원칙에 따라 편의점 등에서 다수의 상비약을 판매하고 있다. 이 국가들에서의 ‘경험적 증거’는 상비약의 약국 외 판매가 심각한 공중보건 위기로 이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도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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