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흥복사 터-조선 원각사로 재건… 원각사지 십층석탑 등 문화재 남아
대한제국 수립 후 서양식 공원 조성… 反日 일환, 관리-서양인 등에 개방
강점기 일반에 개방, 시민 놀이터로… 조선인 모이니 독립선언서 낭독까지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조성 전인 19세기 말, 해당 터에 원각사지 십층석탑과 민가들이 들어선 모습. 사진 출처 서울역사편찬원
《탑골공원 ‘민족 상징’ 된 배경
“봄을 맞는 이 공원…. 아 3월을 맞는 팔각정, 팔각정아 기억하겠느냐? 그때의 그 일을? 기억이 상신(尙新)이구려! 그때가 벌써 5년이로구려. 우리들이 그대의 품에서 크게 소리치며 벅적거렸던 때가. 저들은 우에노, 히비야(도쿄의 대표적인 공원들)를 자랑하지만 우리는 영원히 너를 자랑한다.” (‘봄을 맞는 탑동공원’·開闢 1923년 3월호)》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3·1운동은 서울 종로 탑골공원에 모인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면서 시작됐다. 위에 언급된 기사는 3·1운동 이후 자연스럽게 ‘민족의 상징’이 된 탑골공원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탑골공원이 처음부터 민족의 상징적 공간이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현재 공원에는 원각사지 십층석탑(국보 2호), 대원각사비(보물 3호) 등 중요 문화재가 있다. 조선시대 이곳은 ‘탑동’ 혹은 ‘탑골’로 불렸다. 이는 십층석탑의 존재에서 유래한다. 석탑이나 비석은 오래전 이 자리에 사찰이 있었음을 말해 준다.
탑골공원은 원래 고려시대 창건된 흥복사(興福寺)의 터였다고 알려져 있다. 흥복사는 조선 건국과 함께 폐사됐는데, 1464년 불심이 깊은 국왕 세조가 이를 재건해 원각사(圓覺寺)로 삼았다. 그러나 점차 불교가 쇠퇴하면서 16세기 초 폐사됐다. 절터는 민가가 가득 들어찬 동네로 변모했다. 19세기 말 조선을 방문하고 기행문을 남긴 영국의 지리학자 이저벨라 버드 비숍 여사(1831∼1904)는 이렇게 썼다.
“백색 석탑은 빽빽이 들어선 주택들 뒤에 완벽하게 가려져 있는데, 이 도시에서 보기 드물게 나무가 울창한 숲을 가지고 있다. 석탑 자리는 옴짝달싹할 수 없을 정도로 좁아서 석탑 전체를 사진에 담으려는 사람은 아마도 근처의 담으로 기어 올라가야 할 것이다.”(‘한국과 그 이웃나라들’·1994년)
이 자리에 공원을 만들려는 작업은 1897년 대한제국 수립 전후 시작돼 1900년대 초까지 계속됐다. 공원 조성을 건의하고 추진한 인물은 정부 재정 고문 겸 해관(海關·현재의 세관) 총세무사였던 영국인 존 맥리비 브라운이다. 서양 근대도시에서 공원은 필수 요소이다. 브라운의 제안과 정부의 추진은 대한제국의 반일 친서양 근대화 노선의 일환이었다.
공원은 1903년 준공됐다. 신축한 시설로 눈에 띄는 것이 팔각정이다. 팔각정의 용도는 군악대의 연주회장으로 알려져 있다. 대한제국은 1900년 2월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던 독일군 군악대 출신 프란츠 에케르트를 초빙해 군악대를 조직했다. 그는 대원들에게 서양음악을 처음으로 가르쳤다. 줄곧 조선에서 살다가 1916년 사망한 뒤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군악대는 1년에 2개월씩 매주 목요일 팔각정에서 연주회를 개최했다. 그러나 대중에게 관람이 허용된 것은 아니었다. 주로 서양인과 정부 관리에게만 공개됐다. “공원이라는 말뿐이오, 벽돌담을 높직이 쌓고 사방 문을 꼭 닫아두었다.”(‘조선 양악의 몽환적 내력’·東明 1922년 11월호) 대한제국기 탑골공원은 ‘황실의 공원’이었다. 서양 근대공원의 외관을 본떠 수도의 랜드마크로 조성했지만 대중에게 온전히 열린 공간은 아니었던 셈이다.
탑골공원은 강제병합 이후 1913년 7월 일반에 완전 개방됐다. “중부 탑골 파고다공원은 일요일 외에는 문을 열어놓지 아니하다가 요사이 몇 달 동안은 매일 낮에는 반드시 문을 열어 오더니 29일부터 10월 그믐날까지는 매일 오전 8시부터 오후 11시까지 문을 열어 일반 시민으로 하여금 자유 산보케 한다는데 매점은 경쟁입찰한 결과로 청목당에서 경영하기로 결정하였고 또 밤에는 일한와사회사(日韓瓦斯會社·경성전기회사의 전신)에서 전등을 설비하고 일요일에는 육군 군악대와 이왕가 악대가 교대하여 오후 7시부터 9시까지 화양(和洋)음악을 아뢴다더라.”(매일신보 1913년 8월 28일자)
일제강점기의 탑골공원. 사진 왼쪽으로 새로 지은 정자 등이 보인다. 사진 출처 서울역사박물관매점이 들어오고, 야간 개방을 하면서 전등도 설치됐음을 알 수 있다. 악대의 연주도 이어진 모양이다. 그 밖에 일본식 정원과 정자, 온실 등도 세웠다. 공중화장실도 갖춰 비로소 보통 생각하는 공원의 일반적 모습을 갖췄다. 일제로서는 전혀 예기치 못한 바였겠지만 탑골공원은 누구나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공중의 공간’이 됨으로써 아이러니하게도 3·1운동의 발상지가 됐다.
이후 탑골공원은 끊임없이 ‘그해 3월’을 떠올리는 매개체로 호명됐다. 매해 3월이 되면 신문에는 봄을 맞이하는 사진이 자주 실렸다.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주로 남산이나 장충단 등지의 벚꽃놀이 풍경을 많이 실은 반면 조선어 언론에는 봄맞이 장소로 탑골공원이 자주 등장했다. 물론 당시 시내 중심부에 있는 공원이었기 때문에 당연한 선택일 수도 있다. 하지만 조선어 언론에 ‘3월의 탑골공원’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의미심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징성 때문에 탑골공원에 사람이 모이는 것은 늘 경계 대상이었다. 그러나 일제도 어쩔 수 없이 탑골공원을 ‘조선인의 공원’으로 인식한 듯하다. 1924년 총독부 체신국은 정식 방송국 설립을 앞두고 시험 방송을 시작했다. 대부분 일본어 방송이었다. 1926년 7월 조선어 방송을 확대하면서 방송 청취를 위한 스피커를 다름 아닌 탑골공원에 설치했다. 그곳이 조선인에게 선전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기 때문이다.(매일신보 1926년 7월 9일자)
사실 탑골공원에 사람이 많이 모여든 데는 종로 일대의 거의 유일한 공원이란 점도 영향을 미쳤다. 그 때문에 탑골공원의 운영 방식은 많은 이의 관심 대상이 됐다.
갓을 쓴 노인이 공원 내 풀밭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 탑골공원이 일제강점기에도 도심 속 조선인들의 공원으로 자리 잡았음을 엿볼 수 있다. 사진 출처 서울역사박물관“경성 시중에는 우리가 달음박질을 하고 장난칠 만한 공원 하나가 없다. 특별한 부분에 거의 전용되다시피 하는 남산이나 장충단, 훈련원을 제한 외에는 돈짝만 한 탑골공원이라 하는 것이 있을 뿐이다. 이 탑골공원이라 하는 것이 삼십만 시민의 유일한 놀이터이다. 그러나 놀라지 말어라. 이곳은 공원이 아니라 술집의 정원이라 함이 좋을 것이다. 그 전부터 청목당이라 하는 술집이 있었거니와 근일에 이르러 다시 승리(勝利)라는 요리집을 또 새로 지었다. 돈짝만 한 터전에 술집만 지어놓고 일반의 불평이 있은 뒤 문은 닫아두면서 따로 담을 트고 문을 내는 꼴은 정말 화가 나서 볼 수 없다.”(‘공원인가 주원(酒園)인가’·동아일보 1924년 2월 13일자)
1920년대 탑골공원 후문 부근에는 ‘승리’라는 요릿집이 문을 열었다. 그런데 공원 개방 시간이 끝난 후 승리의 손님에게만 예외적으로 문을 열어주는 것이 문제가 됐다. 공공시설인 공원이 상업적으로 이용되는 것에 대한 비판이 제기된 것이다. 이 문제는 지방의회인 경성부협의회 회의에서도 매년 갑론을박의 대상이 됐다.
결국 여론에 밀린 경성부는 1933년 공원 내 요릿집을 철거하고 그 자리를 어린이 놀이터로 개조했다. 서울 토박이인 아동문학가 어효선(1925∼2004)은 훗날 이렇게 회고한다. “뒷문을 보고 서서 왼쪽은 연못이던 것을 메우고 만든 어린이 놀이터였다. 그네, 미끄럼대, 시소, 뺑뺑이, 정글짐, 철봉 틀이 있고, 모래밭이 있었다.…술래가 아이를 치면 술래를 면하는데, 기둥을 짚고 있으면 못 친다. 돌층계에서는 먼저 올라가기 내기를 했다.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긴 사람이 한 단씩 올라가는 것이었다.”(어효선, ‘내가 자란 서울’)
일제강점기 탑골공원은 ‘민족의 상징’이기도 했지만 서울 시민이 도시 시설의 공공적 운영이란 어떠해야 하는가를 배워 나가는 훈련의 장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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