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과 놀자!/피플 in 뉴스]유언이 “광복 바라면 단합하라”… 임시정부 기둥 이동녕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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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은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 주권을 되찾은 날입니다. 그날의 기쁨 뒤에는 수많은 독립지사의 헌신과 희생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이동녕 선생(1869∼1940·사진)은 교육과 무장 독립운동, 그리고 임시정부 운영이라는 세 축에서 모두 중요한 역할을 한 지도자였습니다.

선생은 충남 천안에서 태어나 한학을 익혔고, 1897년 독립협회 활동을 시작하며 민권과 개화 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제국신문 논설위원으로 ‘민족자강의 방도’를 써서 개혁과 근대화를 호소했습니다. 상동청년회와 청년학우회를 조직해 한글 보급과 청년 교육, 애국 계몽 운동에 힘썼습니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 1910년 국권 강탈을 경험하면서 국내 활동의 한계를 절감하게 됩니다. 결국 선생은 독립운동의 새로운 거점을 마련하고자 중국 만주로 망명합니다. 이듬해 그는 유인석, 이회영, 이상룡 등과 함께 만주 류허(柳河)현 삼원보에 신흥강습소를 세웠습니다. 2년 뒤 이 학교는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하며 독립군 간부를 체계적으로 양성하는 무장 독립운동의 기틀이 됩니다. 청년 수천 명이 군사훈련과 전술 교육을 받고 졸업해 이들은 훗날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 등 항일 무장 세력 핵심으로 성장했습니다. 이동녕이 강조한 ‘실력 양성’의 정신은 독립군 투쟁의 정신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는 무장 투쟁에 머물지 않고 정치·외교적 노선의 필요성도 일찍이 간파했습니다.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하이에서 열린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초대 의장으로 선출된 그는 ‘대한민국’이란 국호와 민주공화제를 확정하고 임시헌장을 선포했습니다. 이후 1927년부터 순국할 때까지 네 차례 임시정부 주석을 맡으며, 이승만과 김구 사이에서 중추 역할을 했습니다. 임정이 파벌과 분열로 흔들릴 때마다 선생은 줄곧 통합을 호소했습니다. 선생은 세상을 떠나기 전 “광복을 하고자 하면 3당 합당을 하라”는 유언을 남기며 ‘단합’을 강조했습니다.

1940년선생은 광복을 보지 못하고 중국 치장(綦江)에서 폐렴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유해는 1948년 국내로 봉환되었고, 대한민국은 국회의사당 앞에 선생의 흉상을 세워 광복의 토대를 다진 그의 정신을 기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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