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배경, 재능 ‘출발선’ 다른데… “운의 격차 보정해야 공정 시작돼”[강용수의 철학이 필요할 때]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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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과 재능 우선시하는 능력주의… 부모 능력이 기회 격차로 대물림돼
공정보단 불평등 고착화 지적 받아… “같은 출발선 보장돼야 정의 사회”
롤스, 배경-재능 등 運 제도로 보정… 불리한 처지라도 노력 통하게 해야

1920년 핀란드 카우하요키 지역에서 남학생들이 달리기 경기 전 같은 높이의 출발선에 나란히 선 모습. 사진 출처 핀란드 유산청
1920년 핀란드 카우하요키 지역에서 남학생들이 달리기 경기 전 같은 높이의 출발선에 나란히 선 모습. 사진 출처 핀란드 유산청
《‘능력주의’가 공정하다는 신화

정의는 시대마다 다양한 기준과 의미를 갖고 변화해 왔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분배의 기준을 마련하는 일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좋은 것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의 기준은 능력의 탁월함(arete)이었다. 가령 전쟁터에 나선 군인은 자신의 목숨까지 희생할 수 있을 정도로 용기를 발휘할 때 이에 걸맞은 명예와 지위를 얻었다. 반면 오늘날 능력주의(meritocracy)는 제한된 사회적 자원의 효율적 분배를 위해 개인의 역량을 서열화하는 시스템으로 자리 잡았다.》

강용수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원
강용수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원
마이클 샌델이 저서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비판한 능력주의는 현대사회를 진단하는 주요한 화두가 됐다. 능력주의는 개인의 노력에 따라 사회적 지위를 분배하는 평가 방식이다. 권력이나 지위, 부와 같은 제한된 사회적 재화를 놓고 경쟁할 때 신분이나 재산보다 노력과 재능을 우선시하자는 것을 말한다. 명확히 드러나는 개인의 능력으로 평가하는 방식이 갖는 효율성은 공정성과도 연결된다. 가령 뛰어난 치료 실력을 지닌 명의가 명예와 부를 얻는 것은 상식에 부합하는 일이다.

이처럼 개인의 역량을 실력으로 공정하게 평가한다면 많은 차별을 없앨 수 있다. 하지만 극소수의 사람들이 모든 보상을 독식하게 되는 부작용도 생겨난다. 능력주의는 노력과 재능을 중시하며 경쟁에서 신분이나 재산 같은 운에 따른 차이를 줄이는 순기능도 있지만, 때론 세대 간 불평등을 심화시키기도 한다. 가장 큰 문제는 경쟁자 자신의 능력보다 부모의 능력을 배경으로 경쟁에서 유리한 자리를 선점하는 일이다. 부모의 능력이 자식의 세대로 이어져 생겨나는 불공정을 흔히 ‘흙수저’ ‘금수저’라고 부른다.

국내 명문대 진학률을 보면 ‘부모 찬스’를 사용한 경우가 많다. 한국은행이 지난해 8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소득 상위 20% 가구 출신의 상위권 대학 진학률이 하위 20%보다 5.4배 높게 나타났다. 학생의 잠재력보다 사회경제적 배경이 명문대 진학 여부를 가를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준 것이다. 영화 ‘친구’에서 교사가 학생을 체벌하며 “느그 아버지 뭐 하시노?”라고 묻는 장면이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한 이유다. 한국만의 일도 아니다. 2019년 미국에선 8년간 2500만 달러(약 346억 원)의 뒷돈을 받고 TV 스타, 기업체 최고경영자(CEO) 등 부유층 자녀를 명문대에 부정 입학시킨 입시 브로커의 행각이 드러나기도 했다.

존 롤스 ‘정의론’의 핵심은 ‘삶의 출발선이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위키미디어
존 롤스 ‘정의론’의 핵심은 ‘삶의 출발선이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위키미디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펼칠 수 있으려면 공정한 출발선이 보장돼야 한다. 출발선에서 평등이 보장되지 않으면 결과에서의 승패도 납득할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존 롤스 ‘정의론’의 핵심은 ‘삶의 출발선이 같아야 한다’는 주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롤스는 전통 이론에서처럼 각자의 가치에 따라 재화, 명예 등을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면서 맞닥뜨린 ‘운(運)’을 공정한 사회적 제도를 통해 보정하려고 시도했다. 부모의 배경이나 선천적 재능은 누구도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른바 ‘운빨’로 이익을 보거나 손해를 봐선 안 된다고 봤다. 그것이 인생을 결정하는 사회는 공정한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생이 100m 경주라면 모든 참가자가 같은 출발선에서 하나의 신호음으로 동시에 출발하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 사회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대입을 비롯해 사회의 여러 관문에서 부모의 지위뿐만 아니라 학연, 지연, 인맥 등이 암암리에 작용해 평가를 왜곡할 수 있다. 그래서 누군가는 도움을 받아 이미 앞서가고, 누군가는 그렇지 못해 뒤처진다. 어떤 이는 아예 달리지도 못한다.

삶의 출발선에서 공정성을 보장하려면 두 가지 ‘운’(우연)을 고려해야 한다. 태생적으로 차이가 나는 부모의 배경(경제력, 지위, 인맥 등)과 참여자의 재능이 바로 그것이다. 부모의 후원으로 달리기 능력이 향상되기도 하지만 개인의 재능 측면에서도 선천적으로 다리가 긴 사람과 짧은 사람이 있고, 건강한 사람과 병든 사람, 심지어 장애인도 있다. 이처럼 우리의 인생은 태어나면서 ‘사회적 재산’과 ‘자연적 재능’ 두 가지 차원의 운에 의해 많이 결정된다.

롤스가 제안한 정의로운 사회는 인생의 출발점에서 운이 작용하는 것을 막는다. ‘최소 수혜자(least advantaged)’, 즉 가장 불운한 약자의 기대치를 높이는 방향으로 설계된다. 아무리 ‘노오력’ 해도 ‘개천에서 용이 나는 일’, 즉 자수성가의 꿈이 불가능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공정한 게임의 법칙도 뒀다. 우연하게 취득한 자연적, 사회적 운을 공동의 이익을 위해 함께 관리돼야 할 사회적 자산 ‘공유자산(common asset)’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천부적으로 유리한 처지에 선 사람이 운으로 얻는 이익은 아주 불리한 처지의 사람의 여건을 향상시켜 준다는 조건 아래서만 정당화된다.

모든 경쟁의 출발선에서 평등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성공, 명예, 부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결과가 아무리 좋아도 출발선이 왜곡된다면 정의롭지 못한 일이 된다. 좋은 사회는 경쟁에서의 공정함을 충분히 보장해 태생적 운이 좋지 않더라도 피나는 노력으로 자신의 꿈을 충분히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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