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6일 미국 워싱턴 의회에 난입해 교도소에서 60일간 복역한 패멀라 헴필 씨가 지난해 1월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콘웨이에서 열린 공화당 행사에 참석했다. 올 1월 사면된 그는 자신이 유죄이므로 사면 또한 부당하다고 밝혔다. 콘웨이=AP 뉴시스
하정민 국제부 차장“저는 유죄입니다. 저의 사면은 미국, 법치주의, 의회 경찰에 대한 모독입니다.”
미국 아이다호주 보이시에 사는 73세 백인 여성 패멀라 헴필 씨는 한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열성 지지층 ‘마가(MAGA·Make America Great Again)’였다. 그는 대통령의 2020년 대선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해 내내 ‘선거 사기’를 외쳤다.
급기야 유방암 투병 와중에도 2021년 1월 6일 다른 마가들과 수도 워싱턴 의회로 돌진했다. ‘마가’와 ‘할머니(granny)’를 합한 ‘마가 그래니’로 불렸던 그에겐 당연한 수순이었다. 당시 이들의 난입으로 5명이 숨졌고 수십 명이 부상당했다. 부상자 대부분은 의회를 지키던 경찰관들이었다.
재판에 넘겨진 헴필 씨는 죄를 인정했다. 그는 2022년 5월 징역 60일, 벌금 500달러(약 70만 원)를 선고받았다. 얼마 후 교도소에서 형기도 채웠다. 그는 수감 과정에서 자신이 법과 민주주의를 어겼음을 깨닫게 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재집권 당일인 올 1월 20일 헴필 씨를 포함해 의회 난입에 가담한 약 1500명을 사면했다. 헴필 씨는 거듭 거부 의사를 밝혔는데도 원치 않는 사면이 이뤄졌다고 반발했다. 각국 언론에 ‘사면의 부당함’도 호소했다.
그는 올 6월 CBS방송 인터뷰에서 “유죄임이 분명한데 어떻게 사면을 받고 어떻게 밤에 잠을 잘 수 있겠느냐. 그날 의회에 있던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고 했다. 영국 BBC와 만났을 때는 “사면을 받아들이면 트럼프의 ‘거짓’과 ‘가스라이팅’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라고 분노했다.
미국은 강력한 대통령제 국가다. 대통령 탄핵을 제외한 거의 모든 연방법 위반에 대한 사면권을 현직 대통령에게 부여한다. 다른 많은 나라와 달리 재판 중인 사건에 대한 사면도 가능하다.
그래서인지 많은 대통령이 사면권을 남용했다. 트럼프 대통령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집권 1기 막바지인 2020년 12월 대규모 사면을 단행했다. 당시 풀려난 이들의 면면을 보자. 우선 러시아가 2016년 미국 대선에 개입해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을 도왔다는 이른바 ‘러시아 스캔들’ 사태 때 허위 증언, 증인 매수 등을 저지른 최측근 겸 전 개인 변호사 로저 스톤이 있다.
장녀 이방카의 시아버지이며 과거 사업가 시절부터 탈세, 증인 매수, 금융 사기 등을 저질렀던 사돈 찰스 쿠슈너도 포함됐다. 2007년 9월 이라크 바그다드 니수르 광장에서 차가 막힌다는 이유로 기관총 등을 난사해 민간인 17명을 학살한 미국 민간 군사기업 ‘블랙워터’ 관계자 4명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4명 중 1명은 종신형, 나머지 3명은 각각 30년형을 선고받았는데 단숨에 자유인이 됐다.
이런 트럼프 대통령을 비판했던 조 바이든 전 대통령 또한 집권 막바지인 지난해 12월 탈세, 불법 총기 소지 등으로 기소된 아들 헌터를 사면했다. 현직 대통령 자녀의 첫 사면이었다. 헌터의 유죄 확정 당시 “법을 존중한다. 사면하지 않겠다”더니 불과 반년 만에 태도를 바꿨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 또한 2001년 1월 임기 종료 약 2시간을 앞두고 마약 밀매로 복역했던 이부동생 로저를 사면했다.
사면권은 전제군주 시절의 잔재다. “네 죄를 사하노라”라는 군주의 한마디로 여러 죄수가 풀려났다. 종종 군주의 포용력을 보여주는 제도로 기능했기에 ‘은사(恩赦)’라는 다소 낯간지러운 호칭이 붙었다.
다만 삼권분립과 민주주의, 법치주의가 정착된 21세기에 굳이 대통령이 광범위한 사면권을 가져야 할까. 미국에서 볼 수 있듯 권력자의 친인척 및 측근에게만 적용되고 전쟁 범죄를 저지른 이와 잡범(雜犯)까지 혜택받는 사면이라면 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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