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짐 정리’를 하며… 남기려 했던 것의 본질[2030세상/김지영]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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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 스타트업 투자심사역(VC)·작가
김지영 스타트업 투자심사역(VC)·작가
행복하기 위해 산다고들 한다. 나는 좀 더 구체적으로, 행복한 기억을 늘리기 위해 산다고 생각한다. 기록에 집착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기록 없이 흘러간 기억은 시간이 흐를수록 희미해지고 이내 손가락 사이 모래알처럼 흩어진다. 그래서 나는 사진을 찍고 일기를 쓴다. 바득바득 기억하고, 단물이 빠질 때까지 곱씹으며 추억화의 공정을 거친다.

그러다 보니 언젠가부터 사진 정리가 골치다. 여행이라도 한번 다녀오면 그 사진을 정리하는 데에 거짓말 조금 보태 여행만큼의 시간이 든다. 당장 사용 중인 스마트폰에만 정리 안 된 수만 장의 사진이 기다리고 있고, 클라우드와 외장하드에는 일단 옮겨놓고 보자 했던 것들이 쌓여 열어보기도 무서운 무질서가 됐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이 많은 추억을 다 어쩌면 좋아….” 스크롤을 내리다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얼마 전 책, 옷, 가구 등의 짐을 싹 정리한 적이 있는데, 비슷한 마음으로 ‘디지털 짐 정리’를 하기로 했다. “그래, 죽을 때 이 사진들을 다 짊어지고 갈 것도 아니고!” 호기롭게 폴더 하나하나를 열어보기 시작했다.

풋풋했던 대학 새내기 시절부터 처음으로 혼자 했던 유럽 배낭여행, 온전히 내 힘으로 마련한 원룸 자취방, 이후 혼자 혹은 함께 했던 숱한 여행의 기록들. “우리 엄마 아빠 이때만 해도 젊었네.” 머리가 까맸던 아빠와 주름이 없었던 엄마.

그러다 한 영상에 오래 눈이 머물렀다. 할머니와 어린 조카가 장난을 치며 노는 모습. 할머니는 연신 얼굴을 숨겼다가 ‘까꿍’ 내밀기를 반복하고, 조카는 할머니의 주름진 손을 만지다 뭐가 재밌는지 까르르 웃는다. 할머니는 5년 전에 돌아가셨고, 품에 쏙 안기던 말캉한 아기는 내년이면 중학생이 된다.

막상 열어보니 그 방대한 양도 양이었지만, 오랜만에 들여다본 어떤 사진들은 너무 많은 추억을 불러들여와 도무지 다음 진도를 나갈 수가 없었다. 폴더 몇 개 정리하는 데에만 한나절이 걸렸고 결국 백기를 들었다.

이후 다짐했다. 적게 찍고 자주 보기. 사진을 정리하며 분명하게 깨달았다. 추억하고 싶은 것은 결국 그때 내가 어디를 갔고 무엇을 먹었는지가 아니라 그때의 나, 나와 함께했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멋진 거리, 화려한 음식 사진은 고민 없이 지울 수 있어도 결국 남겨놓고 싶은 것은 나와 소중한 이들의 모습이라는 것을. 앨범에도 가슴속에도.

‘버리기’라는 행위가 주는 위안에 대해 이런 글을 쓴 적 있다. “돌아보니 그것은 일종의 임사체험(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체험)이었다. 떠남을 준비하듯, 내게 속한 물건들 하나하나의 의미를 응시하고 덜어내는 것. 그러다 보면 종래에는 꼭 유언 같은 물건들 몇 개만이 수중에 남았다.”(책 ‘행복해지려는 관성’의 ‘버리기가 주는 위안’ 중)

언젠가의 유언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손바닥 안의 무질서를 정비한다. 귀한 순간, 귀한 모습을 수시로 추리고 들여다보리라. 그리하여 삶의 마지막 순간에 떠올리고 싶은 장면들을 잊지 않고 기필코 떠올려내리라. 결국 ‘행복한 인생’이란, 그 장면들로 결정지어진다고 믿는다.

#행복#기억#사진정리#추억#디지털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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