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서울에서 열린 바둑 대국장에 세계의 시선이 쏠렸습니다. 구글 딥마인드의 인공지능 알파고와 이세돌 9단(42·사진)의 대결이었습니다. 앞서 세 판에서 연달아 패배한 뒤 맞은 4번째 대국. 잠시 흐르던 정적을 가르고 이세돌이 돌 하나를 내려놓자 객석에서 탄성이 터졌습니다. 훗날 ‘신의 한 수’로 기억된, 인류가 인공지능과 맞서 거둔 첫 승리의 순간이었습니다.
전남 신안군 작은 섬에서 태어난 이세돌은 12세의 나이로 최연소 입단 상위권(역대 3위) 기록을 세우며 프로 바둑기사가 됐습니다. 2000년에는 내리 32연승이라는 기록을 세우고 세계 대회인 LG배 결승에 오르며 ‘불패 소년’이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한국기원이 주관하는 승단대회를 따로 통과해야만 승단할 수 있었던 규정 때문에 한동안 3단에 묶여 있던 이세돌은 세계대회 성적을 반영하는 규정이 신설된 2003년 LG배 우승, KT배 준우승, 후지쓰배 우승으로 불과 5개월 만에 9단에 올랐습니다. 이후 정석과 관습을 과감히 깨는 그의 공격적이고 창의적인 기풍은 ‘이세돌 바둑’이라는 하나의 브랜드로 자리 잡았습니다.
알파고와의 대결은 바둑에서 인류가 인공지능과 정면으로 대결을 벌인 역사적 실험이었습니다. 훗날 이세돌의 회고에 따르면 1국 불과 10수 만에 실력 차이를 체감했다고 합니다. 경우의 수가 폭증하는 바둑 초반에 인간의 직관이 AI의 빠른 연산을 이기기 어려웠던 겁니다. 4국 중반 진입부에서 이세돌은 예상 밖의 수를 둡니다. 알파고의 오류를 유도하려는 계산된 수였습니다.
결국 알파고는 치명적 버그를 드러냈고, 이세돌은 그 빈틈을 파고들어 승리를 거뒀습니다. 상대의 약점을 읽고 나아가 빈틈을 만들어낸 고도의 전략이었습니다.
이세돌은 2019년 현역 은퇴를 선언했으며 현재 울산과학기술원(UNIST) 특임교수로 활동 중입니다. 얼마 전 스승 조훈현 9단, 이창호 9단의 대결을 다룬 바둑 영화 ‘승부’가 화제를 모으며 그의 이름이 대중의 기억 속으로 다시 소환되기도 했습니다.
메이저 세계대회 통산 14회 우승(역대 2위)이라는 기록만으로도 그는 전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여전히 그를 떠올리는 건 숫자보다 장면입니다. 9년 전 그가 바둑판 위에 올려놓은 ‘한 수’는 승패의 기록을 넘어 인공지능 시대를 가르는 문명사적 표식으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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