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천대 의대 길병원 심장내과 정욱진 교수가 지난달 26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정책 토론회에서 신약 등의 국내 수급이 어려워지는 이른바 ‘코리아 패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진한 의학전문기자·의사 likeday@donga.com
이진한 의학전문기자“어떻게 30년 동안 국내에 치료제가 안 들어올 수 있나. 정부는 신약의 경제성 평가, 형평성 문제 등의 이야기만 한다. 희귀질환 약이라 그 기준에 맞출 수 없다. 그러는 동안 환자들은 죽어 나가고 있다.”
지난달 26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폐동맥고혈압 치료환경 개선을 위한 정책토론회’에서 가천대 의대 길병원 심장내과 정욱진 교수(대한폐고혈압학회장)는 1인 시위를 해서라도 점점 심해지고 있는 코리아 패싱 상황을 해결하고 싶다고 했다. 코리아 패싱은 낮은 국내 의약품 가격을 이유로 글로벌 제약사들이 국내 신약 출시를 꺼리거나 이미 출시한 의약품마저 공급을 중단하는 현상을 말한다.
폐동맥고혈압 치료제로 언급된 코리아 패싱 약은 다국적 제약사 GSK의 ‘에포프로스테놀’이다. 토론회에서 제약사와 약의 실명까지 밝혀가면서 이를 외면하는 제약사와 보건당국에 작심한듯 목소리를 높였다. 정 교수는 폐동맥고혈압 치료에 효과적인 약이 30년 동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한국만 배제되다 보니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사망하는 환자들도 많다고 했다.
정 교수는 “폐동맥고혈압은 진단받은 처음부터 효과적인 약을 확실하게 사용해 초반에 잘 조절해야 되는 질환이다. 그런데 이미 나빠진 상황에서 아무리 좋은 약을 투여해도 그땐 늦는다”고 지적했다. 일본은 바로 치료제를 도입해 사용하면서 폐동맥고혈압 질환 5년 생존율이 95%나 되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효과 좋은 약이 여전히 공급되지 않으면서 5년 생존율이 71% 정도로 많이 뒤처진 상황이다.
우리나라는 유독 희귀질환 신약과 관련해서 안타까운 상황이 많다. 이미 들어온 약을 사용하는 것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다. 부작용을 줄여 생존율을 높인 혁신 약도 바로 쓸 수 없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희귀질환이 시신경척수염 범주질환이다. 이 질환은 시신경이나 척수 등 중추신경계에 염증이 발생하는 자가면역질환이다. 한 번만 재발해도 실명, 마비 등이 발생할 수 있는 매우 무서운 질환이다.
현재 90% 재발을 막을 수 있는 리툭시맙 등 혁신적인 신약이 국내에 도입됐음에도 의료보험 시스템상 바로 사용하지 못하고 기존 약에 먼저 의존해야 된다. 기존 약제는 재발 확률이 높다. 환자는 실명이나 마비 등 재발을 겪은 후에야 재발이 덜 되는 효과적인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게 현실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다.
이런 약은 또 있다. 암 억제 유전자 이상으로 뇌 척수 신장 췌장 망막 등에 종양이 생기는 폰히펠린다우 증후군도 그렇다. 이 질환에 걸리면 우리 몸 곳곳에 암이 발생하기 때문에 매번 암을 제거해야 한다. 그런데 유전자 치료제 신약인 웰리렉을 복용하면 곳곳에 생기는 암을 미리 막을 수 있다. 이 약도 국내에 들어와 있지만 약값이 비싸고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환자가 약값을 모두 부담해야 한다. 환자들에게는 ‘그림의 떡’인 약이 됐다.
이 때문에 희귀질환으로는 드물게 웰리렉의 보험급여를 요청하는 국민청원에서 무려 5만 명의 동의를 받아냈다. 이 약을 사용할 수 있는 신규 환자는 국내에 5명이 넘지 않을 것으로 보기 때문에 재정에 큰 타격도 없어 보이는 데도 여전히 건강보험 적용에 대해선 깜깜무소식이다.
폐동맥고혈압, 시신경척수염 범주질환, 폰히펠린다우 증후군 등 대부분 희귀질환들은 환자 수가 적고 치료제가 고가인 경우가 많아 기존 신약 등재 평가 기준으로는 적절한 접근이 어려운 게 현실이다. 이러한 신약들이 국내에 제때 도입돼 한국 환자들이 초기부터 효과적인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희귀질환 치료제에 대해서는 보다 유연하고 환자 중심적인 검토 체계가 반드시 마련돼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이 “희귀하다고 포기하지 않고 난치라고 외면하지 않는 나라를 만들겠다”며, 희귀난치성 질환에 대한 보장 강화를 약속하지 않았던가. 보건당국자는 희귀질환을 진료하면서 답답한 현실에 눈물을 흘리는 의사와 치료비 때문에 절망에 빠진 환자의 현장 목소리를 꼭 챙겨주길 바란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