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오전 필리핀 마닐라 공항에서 전세기 한 대가 이륙했다. 기내에는 주황색 티셔츠에 영문 이름이 새겨진 명찰을 단 한국인 범죄 피의자 49명이 탑승했다. 한국 경찰은 피의자들에게 한 명씩 ‘미란다 원칙’을 고지하고 수갑을 채웠다. 영토로 간주되는 국적기 내에서 체포영장을 집행한 것이다. 한국판 ‘콘 에어’로 불리는 역대 최대 피의자 송환 작전의 막이 오르는 순간이었다.
▷기내에는 피의자의 2배가 넘는 124명의 경찰이 탑승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중앙에 피의자를 두고 양쪽에 경찰이 앉았고, 화장실 갈 때도 동행했다. 포크와 나이프 없이 먹을 수 있는 샌드위치가 식사로 나왔다. 승무원 8명은 모두 남성이었고, 필리핀 이민청 직원 12명과 경찰병원 의료진 2명도 동행했다. 경찰은 테이저건도 지참했지만 다행히 사용할 일은 생기지 않았다. 비행 4시간 만에 인천공항에 도착한 피의자들은 대기하던 버스에 올라 관할 경찰서로 이송됐다. 경찰은 체포영장 후 48시간 내 구속영장을 신청해야 하는 만큼 신속하게 조사한 뒤 구속영장을 신청할 방침이다.
▷이날 송환된 피의자들은 국내에서 범죄를 저지른 후 필리핀으로 도주했거나, 필리핀에서 한국인 대상 범죄를 저질렀다는 혐의를 받는다. 조직 폭력, 불법 도박 사이트 운영, 보이스피싱, 횡령 등 혐의도 가지각색이다. 경찰은 이들로 인해 국민 1322명이 총 605억 원의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49명 중 45명이 인터폴 적색수배 대상 흉악범이다. 송환 피의자 중에는 기업에서 200억 원을 횡령하고 무려 16년 동안 필리핀에서 숨어 지냈던 60대도 있었다.
▷콘 에어는 ‘수형자를 태운 비행기(Convict Airplane)’의 줄임말로 미 법무부 산하 연방보안관실(USMS)에서 운영하는 수형자 항공 이송 시스템을 뜻한다. 1997년 개봉한 동명의 할리우드 영화 덕분에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한국에선 2017년부터 경찰이 전세기를 동원한 우리 식 ‘콘 에어 작전’을 진행하고 있다. 한 번 전세기를 빌리는 데 예산 1억 원가량이 들지만 일반 송환 절차가 길게는 몇 년씩 걸리다 보니 생각해 낸 고육지책이다. 하지만 여전히 매년 1000명 안팎이 해외로 도피하는데 송환되는 인원은 절반 남짓에 불과하다.
▷전세기까지 띄울 정도로 세계 곳곳에서 데려올 범죄 피의자들이 늘었다는 건 씁쓸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최근 중국, 필리핀, 캄보디아 등을 거점으로 진행되는 한국인 대상 범죄는 갈수록 대담해지고 교묘해지고 있다. 이번 작전을 통해 범죄자들이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전세기 운용에 들어간 국민 세금이 제값을 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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