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우경임]미국행 공포증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9월 7일 23시 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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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국 방문자들 사이에서 도착 공항에서 ‘진실의 방’이라 불리는 집중조사실(Secondary Inspection Room)에 끌려갔다는 공포스러운 경험담이 넘쳐난다. 주로 입국 목적이 의심스러울 때 추가적인 조사를 받는 곳이다. 테이저건으로 무장한 조사관이 “거짓말하지 말라”며 집요하게 추궁하기 때문에 ‘진실의 방’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관광지가 아닌 곳을 방문하는 기술 인력이나 20, 30대 여성들이 입국 심사를 통과하지 못해 되돌아오는 경우가 부쩍 늘었다.

▷5일 미국 조지아주 현대자동차-LG에너지솔루션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이 급습당하기 이전부터 이미 미국 출장 경계령은 울리고 있었다. 미국에서 일하려면 전문직(H-1B) 비자를 받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매년 3월마다 신청해야 하므로 건설 공정에 따라 적시에 인력을 파견할 수 없고 이마저도 신청자 10명 중 1명도 받지 못한다. 주재원(L) 비자는 미국 법인이 있어야 발급돼 협력사들은 애초에 해당 사항이 없다. 마지막 선택지가 단기 상용(B1) 비자인데 지난해 거절률이 27.8%에 달한다.

▷미국에서 합법적으로 일할 길이 막혀 있으니 관광·상용·경유 목적으로 최대 90일까지 미국에 체류할 수 있는 이스타(ESTA)로 입국하는 편법이 쓰였다. 그런데 미국 국토안보부가 이런 관행에 제동을 걸고 있다. 6월 미국 미시간 공장에 생산라인 설치 및 점검을 하기 위해 시카고 공항에 도착한 LG에너지솔루션 엔지니어가 무더기로 입국을 거부당했다. 이들은 B1 비자를 다시 신청했지만 발급을 거절당했다. 5월에는 현대차 기술 인력이 조지아주 애틀랜타 공항에서 돌아와야 했다. 인천공항에서 비행기 탑승 직전 이스타 거절이 통보되는 경우도 있다.

▷미국이 비자 장벽을 높게 쌓으면서 유학생 사회도 위축되고 있다. 지난해 학생(F) 비자의 거부율은 41%로 역대 최고였다. 어렵게 학생 비자를 받아 입국했더라도 과속 딱지 같은 경범죄 기록만으로 추방당하고 있다. 올해 5월까지 1600명이 F 비자를 취소당한 것으로 집계됐는데 인도, 중국, 한국인 유학생이 많았다. 최근 국토안보부는 F 비자 유효 기간을 4년을 초과하지 못하도록 하는 규정을 발표했다.

▷무자비한 불법 이민 단속은 아무리 인건비가 비싸고 숙련도가 떨어지더라도 미국인을 고용하라는 압박이다. 깐깐한 유학 비자 발급은 비싼 등록금은 내되 일자리를 구할 꿈도 꾸지 말라는 뜻이다. 표면적으로 일자리 보호를 내세웠지만 사실상 외국인 차별과 다름없다. 미국은 다양성과 포용성의 힘으로 혁신을 창출했고, 그 덕에 부유해졌다. ‘미국을 다시 하얗게(Make America White Again)’란 말이 더 들릴수록 미국은 경쟁력을 잃어갈 수 있다.

#미국 입국#진실의 방#비자 거부#H-1B 비자#ESTA#불법 이민 단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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