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각화에서 내비게이션까지… 국가 흥망성쇠까지 좌우한 공간 언어[강인욱 세상만사의 기원]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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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역사의 길 바꾼 지도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현대인들은 운전을 하거나 모르는 장소를 찾아갈 때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화살표를 따라 움직인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공간을 추상화하고 길을 그려내며 생존해 왔다. 반구대 같은 암각화에서 고대 목판 지도까지…. 지도는 단순한 그림이 아닌 인간의 두뇌가 진화한 흔적이자 역사를 움직인 도구였다. 수천 년간 전쟁의 승패와 국가의 운명을 좌우해온 지도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알아보자.

인간의 진화 과정 속 지도

인간은 스마트폰이나 내비게이션이 없던 시절 종이 지도 한 장에 의지해 먼 길을 떠났다. 때로는 약도만으로도 수백 km 떨어진 목적지까지 도달했다. 이러한 능력 뒤에는 인간 진화의 과정이 숨어 있다.

인간의 두뇌는 주변 환경과 동물의 움직임을 그림처럼 받아들이지 않고, 기호나 텍스트로 바꿔 이해했다. 한정된 두뇌에 더 많은 정보를 넣고 꺼내기 위해 압축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컴퓨터에 저장할 때 사진이나 영상보다 텍스트 파일의 용량이 훨씬 작은 것과 같은 이치다. 그 결과 우리는 이태백의 시 한 줄을 읽으면 곧장 서역을 향하는 나그네와 그 위를 밝히는 달이 떠오르는 유추 능력이 발달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자연과 타인의 움직임을 패턴으로 추상화해 대응하는 능력으로 이어졌다. 지도와 같이 선과 점을 긋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거대한 자연과 지리 환경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장기나 체스는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지형과 전략을 이해하는 훈련의 장이었다.

세계 最古 지도 ‘이마고 문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지도 ‘이마고 문디’. 기원전 6세기 바빌로니아에서 만들어진 점토판 지도로, 현실의 지형뿐 아니라 상상의 장소까지 담아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지도 ‘이마고 문디’. 기원전 6세기 바빌로니아에서 만들어진 점토판 지도로, 현실의 지형뿐 아니라 상상의 장소까지 담아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지도는 기원전 6세기 바빌로니아에서 만들어진 점토판 지도 ‘이마고 문디(Imago Mundi·라틴어로 세계의 이미지라는 뜻)’다. 이마고 문디는 바빌로니아를 중심으로 주변 도시를 표시했을 뿐만 아니라 신화 속 바다와 상상의 장소까지 함께 그려 넣었다.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까지 담아낸 것이다.

인류의 공간 인식은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시작됐다. 구석기시대 동굴벽화나 세계 곳곳의 신석기 암각화는 주변 지형을 이해하고 익히는 역할을 했다. 최근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반구대 암각화도 마찬가지다. 바다에서는 고래가 뛰놀고, 그 위에는 배가 지나가며 이어지는 강과 육지에는 담장과 동물들이 묘사돼 있다. 이는 주변 환경을 추상화한 하나의 지도다. 이마고 문디처럼 실제 지리와 신화를 아우른 세계지도는 결국 인간이 공간을 이해하고 세계를 설명하려 한 최초의 시도였던 셈이다.

국경 긋기와 전쟁에 필요

중국에서 지도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시점은 만리장성을 쌓는 시기와 겹친다. 그전까지 중국의 제후국은 성을 중심으로 거점만을 점유하는 식이었지만 장성을 쌓는다는 것은 요즘으로 치면 국경을 긋는 일이었다. 이때부터 국가는 비단 거점의 집합이 아닌 ‘영역’을 가진 존재로 인식됐고, 국경과 전쟁에는 정확한 지도가 필요했다.

실제로 지도는 유명한 진시황의 암살 사건에 등장한다. 기원전 227년에 연나라 태자 단이 진시황을 암살하기 위해 형가라는 자객을 보냈다. 진시황을 가깝게 알현하기 위해 진나라에서 망명한 장수 번어기의 목과 연나라를 정복하는 길이 그려진 독항(督亢·허베이 남부) 지역의 지도를 바쳤다고 정사에 기록돼 있다. 형가의 시도는 실패했고, 그의 지도가 빌미가 돼 연나라는 패망의 길을 걸었다.

기원전 4세기∼기원전 3세기 중국 간쑤성 팡마탄 지역의 진나라 무덤에서 발견된 2.5∼5cm크기의 약도. 사진 출처 간쑤성박물관
기원전 4세기∼기원전 3세기 중국 간쑤성 팡마탄 지역의 진나라 무덤에서 발견된 2.5∼5cm크기의 약도. 사진 출처 간쑤성박물관
형가가 품고 있었던 지도의 실물은 남아 있지 않지만 고고학은 당시의 지도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진시황과 형가의 이야기가 등장한 기원전 4세기∼기원전 3세기 실크로드의 입구인 중국 간쑤성 팡마탄 지역의 진나라 무덤에서 목판에 새겨진 지도 일곱 점이 발견됐다. 해당 지도들은 정치도(행정구역), 지형도(산천), 경제도(마을, 자원) 등으로 나뉜다. 이는 당시 목적에 맞게 지도를 만들었음을 뜻한다. 또 각 지도는 서로 맞물려 이어 붙일 수 있게 제작돼 지형과 경제를 종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고대의 지리정보시스템(GIS)이라 부를 만하다.

같은 무덤에선 휴대가 가능한 2.5∼5cm 크기의 약도도 발견됐다. 비록 사이즈는 작아도 꼭 필요한 지명과 강들이 간략하게 표시돼 있다. 이 지도는 시신의 가슴 한가운데에서 발견됐다. 지도에 표시된 지역이 여행지였는지 고향땅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가슴에 품을 만큼 소중한 물건이었음은 분명하다. 팡마탄에서 출토된 이 지도는 휴대용 약도의 기원인 셈이다.

고조선 때부터 활용 가능성

한국사에서 지도가 언제 처음 등장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한나라와 고조선의 전쟁 기록을 보면 지도와 같은 수단이 활용됐을 가능성이 크다. 한나라는 산동반도에서 군사를 일으켜 왕검성을 향해 진군했는데, 수군과 육군으로 나눠 같은 시각에 협공하는 작전을 세웠다. 수군은 산동반도와 요동반도 사이의 섬들을 따라 항해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육군은 요서 지역을 지나 광대한 늪지대인 요하유역을 건너야만 했다. 이처럼 험난한 경로를 동시에 조율했다는 것은 이미 정밀한 지도가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문헌에 따르면 고구려에도 ‘봉역도(封域圖)’라는 지도가 존재했다. 통일신라 시기에도 지도와 관련된 기록이 보인다. 이들 국가는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곳곳에 요새와 교통로를 건설했는데, 이는 체계적인 지도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특히 고구려가 한강 유역으로 진출해 백제의 수도를 압박하던 흔적은 지도 활용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현재 서울 광진구 아차산, 경기 구리시 일대의 여러 요충지에는 규모가 다른 여러 군사거점이 구축돼 있었다. 다양한 병력이 전략적으로 주둔하며 관리됐다는 의미다. 더 나아가 고구려는 만주 전역을 아우르는 거대한 영토를 통치해야 했다. 지도 없이는 이 복잡한 행정과 군사적 운영을 수행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조선 욕망 담긴 ‘혼일강리도’

조선 왕조가 시작된 뒤 10년 만인 1402년 만들어진 세계지도 ‘혼일강리도’. 한반도를 거대하게 표현했다. 사진 출처 규장각
조선 왕조가 시작된 뒤 10년 만인 1402년 만들어진 세계지도 ‘혼일강리도’. 한반도를 거대하게 표현했다. 사진 출처 규장각
고조선에서 삼국(고구려·백제·신라), 통일신라에 이르기까지 지도는 땅을 지배하고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었다. 이 전통은 조선 건국과 함께 세계관을 담아내는 작업으로 확대됐다. 그 상징적 결실이 바로 1402년에 제작된 세계지도인 ‘혼일강리도(混一疆理圖)’였다.

혼일강리도는 명나라의 대명혼일도를 참고했지만 조선과 일본을 자신들만의 시각으로 재구성한 지도였다. 특히 아프리카 지역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한반도를 거대하게 표현하면서 그 안의 지리를 자세히 표현했다. 겉으로는 소중화(小中華)를 표방했지만 자신만의 세계를 건설하려는 조선의 욕망이 드러난 셈이다. 지도 위에 담긴 것은 신생 왕조가 품은 자신감과 미래였다.

그러나 조선이 쇄국의 길을 걷게 되면서 이러한 전통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구한말에 서구 열강과 일본은 우리 땅을 경쟁적으로 측량하며 지도를 만들었고, 그 지도는 식민지배의 증거로 변했다. 1402년에 자신만의 세계를 그렸던 조선은 500여 년 만에 나라와 함께 지도마저 빼앗겼다. 지도는 자부심의 기록이자 동시에 국권 상실의 증거가 됐다.

지도를 잃어버린 시대

지도는 인간이 공간을 인식하는 가장 정교한 도구였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에 들어서면서 우리는 점점 그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 이제는 매일 다니는 길조차 내비게이션이 안내해야 안심할 수 있을 정도다. 사피엔스의 본능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우리는 인간의 능력을 인공지능(AI)이 대체하는 시대를 우려한다. 하지만 인간은 이미 지도를 읽는 능력부터 잃어가고 있다. 그 자리는 인공위성과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이 꿰찼다. 오늘날 전쟁은 드론으로 치러지고, 국경은 위성으로 감시된다. 어쩌면 인류를 위협하는 것은 핵무기가 아닌 ‘지도의 주도권’일지도 모른다. 최근 한미 관세협상 과정에서 구글이 한국의 5000 대 1 고정밀 지도 자료의 반출을 요구하며 벌어진 논란은 이를 잘 보여준다. 반도체 관세만큼이나 지도 정보의 주권은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사안이다. 비록 지도를 보는 인간의 능력은 약해졌지만 지도의 위력은 과거보다 더 강해졌다. 지도를 잃어버린 시대에 지도가 가진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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