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히 물드는 아름다움[정덕현의 그 영화 이 대사]〈73〉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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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처음부터 풍덩 빠지는 줄만 알았지, 이렇게 서서히 물들어 버리는 것인 줄은 몰랐다.”

―이정향 ‘미술관 옆 동물원’


이정향 감독의 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에서 춘희(심은하 역)는 철수(이성재 역)에게 생긴 감정을 이렇게 말한다. 철수는 어느 날 갑자기 춘희의 집으로 들어왔다. 여자 친구 다혜(송선미 역)가 이사 간 줄 모르고 그 집에 들어온 거였다. 그렇게 티격태격하던 철수와 춘희는 어쩌다 함께 지내게 되고, 어느새 저도 모르는 서로에 대한 감정이 생겨난다. 미술관을 좋아하는 춘희와 동물원을 좋아하는 철수는 그만큼 취향도 성향도 다르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점점 물들어 간다.

‘미술관 옆 동물원’은 경기 과천시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대공원 동물원을 배경으로 한 영화다. 춘희가 공모에 내려고 쓰던 시나리오를 철수가 같이 쓰게 되는데, 그 시나리오 속 인물들인 인공(안성기 역)과 다혜가 각각 일하고 만나는 곳이 바로 그 미술관과 동물원이다. 미술관의 정적인 분위기와 동물원의 동적인 분위기는 각각의 캐릭터로 그려지고, 그 캐릭터는 또한 이 시나리오를 쓰는 춘희와 철수를 대변한다. 그들은 사사건건 싸우지만 의외로 잘 어울린다. 과천의 미술관과 그 옆의 동물원이 그런 것처럼.

미술관과 동물원처럼, 너무나 달라 결코 섞이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서서히 어우러져 가는 모습은 아름답다. 그건 아마도 천천히 물들어 가는 모든 것들에게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일 것이다. 순식간에 바뀌는 것들은 충격을 줄 뿐, 아름답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뜨겁던 한낮이 지나 저녁으로 물들어 가는 그 시간이 낮이나 밤보다 훨씬 아름다운 이유다. 무더웠던 여름을 지나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기분 좋은 가을의 문턱이다. 미술관 옆 동물원이 걷고 싶어지는 계절이 오고 있다.

#미술관 옆 동물원#이정향#춘희#철수#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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