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아무리 잘 싸워도 패자는 기억 속에서 사라질 때가 많다. 그런데 테니스는 결승전 패자가 시상식 이후에도 코트에 남는다. 그러고는 승자와 관중들이 보는 앞에서 먼저 마이크를 잡는다. 다른 종목에선 보기 드문 일이다.
간절히 원했던 트로피를 빼앗긴 직후지만 선수들은 승자가 얼마나 훌륭한 경기를 펼쳤는지, 자신에게 부족했던 점은 무엇이었는지 등을 얘기한다. 꽤 많은 선수가 눈물을 흘리면서도 축하와 반성이 담긴 연설을 한다. 메이저대회 우승만 24번 한 노바크 조코비치(38·세르비아)는 “피가 아직도 뜨거운 순간에 해야 하는 일이다.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하지만 감정을 억누르면서 좋은 얘기를 하는 게 늘 쉽지만은 않다”고 말했다.
여자 테니스 세계 랭킹 1위 아리나 사발렌카(27·벨라루스)는 메이저대회 호주오픈과 프랑스오픈에서 잇따라 준우승에 그친 뒤 상대에 대한 축하로 시작하는 연설의 관례를 깼다. 그는 “끔찍한 경기를 해 솔직히 너무 힘들다. 코치들을 볼 면목이 없다”며 자책하는 데 집중했다. 이에 팬들 사이에선 승자를 인정하지 않은 처사라는 비판이 일었고, 사발렌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앞으로 이런 일은 없을 것”이라며 사과했다.
‘커리어 그랜드슬램’(4개 메이저대회 모두 우승) 기록을 보유한 마리야 샤라포바(38·러시아·은퇴)는 최근 “준우승 연설은 가장 힘든 순간”이라면서도 “인성은 힘든 순간을 헤쳐 나갈 때 드러난다. 그런 점에서 준우승 연설은 (미래의) 승리에 도움이 되는 것 같다”고 했다.
샤라포바는 선수 시절 메이저대회 시상대에 10차례 섰다. 우승 연설은 다섯 번 했다. 첫 번째 우승 연설은 2004년 윔블던이었고, 당시 샤라포바에 앞서 마이크를 잡았던 패자는 세리나 윌리엄스(44·미국·은퇴)였다. 마지막 메이저대회 연설은 2015년 호주오픈이었다. 당시 윌리엄스에게 패해 준우승 연설을 한 샤라포바는 “최고 선수인 윌리엄스와 경기하게 되면 설렌다”면서 “오늘은 부족했지만, 그동안 내가 쏟은 노력에는 자부심을 느낀다. (호주오픈 주 경기장인) 로드 레이버 아레나에서 인생 최고의 승리도 해봤고, 가장 힘든 패배도 해봤다. 하지만 그게 테니스 선수의 숙명”이라고 했다.
샤라포바는 지난달 테니스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입회 기념식 무대에 샤라포바보다 먼저 올라온 사람이 ‘천적’이었던 윌리엄스였다. 샤라포바는 윌리엄스와의 상대 전적이 2승 22패다. 샤라포바에게 가장 많은 상처를 줬던 선수가 샤라포바의 명예의 전당 입회를 소개하는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이는 샤라포바가 윌리엄스를 직접 초대하면서 시작된 일이다. 샤라포바는 “윌리엄스는 내 정체성을 만들어준 선수다. 늘 내가 최고의 모습을 끌어내도록 해줬기에 영원히 고마워할 것”이라고 했다.
누구에게나 패배는 피하고 싶은 일이다. 하지만 이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이겨내는 건 다시 도약하는 지름길이다. ‘자책 연설’로 홍역을 치른 사발렌카는 올 시즌 마지막 메이저대회인 US오픈에서 정상에 올랐다. 사발렌카는 우승자 연설에서 준우승에 그친 어맨다 애니시모바(24·미국)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메이저대회 결승에서 지는 게 얼마나 힘든지 누구보다 잘 안다. 하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내가 장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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