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래: 사기(史記)의 오자서열전(伍子胥列傳)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중국 춘추시대 초(楚)나라 명문가 출신인 오자서는 태자의 스승인 아버지 오사(伍奢)와 형 오상(伍尙)이 간신(奸臣) 비무기(費無忌)의 모함을 받아 평왕(平王)에게 죽임을 당하자 복수를 다짐하며 오(吳)나라로 달아났습니다. 오자서는 오왕 합려(闔廬)에게 신임을 받아 오나라의 행인(行人·외교를 담당하는 관직)이 되었고, 9년이 지나 손무(孫武)와 함께 초나라를 공격했습니다. 초나라의 수도를 함락시켰지만 원수인 평왕은 이미 죽고 없었지요. 그 후계자 소왕(昭王)의 행방 또한 묘연해 찾을 수가 없자 분노를 삭일 수 없었던 오자서는 평왕의 무덤을 파헤치고 그 시신을 꺼내 300번이나 채찍질을 가한 후에야 그만두었습니다. 그때 산속에 피해 있던 오자서의 친구 신포서(申包胥)가 사람을 보내어 “일찍이 평왕의 신하로서 왕을 섬겼던 그대가 지금 그 시신을 욕되게 하였으니, 이보다 더 천리(天理)에 어긋난 일이 또 있겠는가”라며 오자서를 꾸짖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오자서가 “해는 지고 갈 길은 멀어, 도리에 어긋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네(吾日暮途遠 故倒行而逆施之)”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습니다.
● 생각거리: 경기 가평군 조종면에 대통묘(大統廟)가 있는데 임진왜란 때 구원병을 보내 조선을 구해준 명나라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 지은 사당입니다. 주변에 있는 조종암(朝宗巖)에 효종(孝宗)이 삼전도의 치욕을 씻기 위해 북벌을 도모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뜻을 담아 ‘날은 저물고 길은 먼데, 지극한 아픔이 마음에 있다(日暮途遠至痛在心)’라는 8자를 새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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