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은 태양광·연료전지·배터리를 결합한 12MW(메가와트) 규모의 ‘마이크로그리드(소규모 독립형 전력망)’를 뉴욕 JFK 공항에 구축하고 있다. 독일은 북부의 풍력과 남부 산업단지를 잇는 초고압직류송전(HVDC)망을 건설 중이며, 일본 역시 2040년까지 45GW(기가와트) 규모의 해상풍력과 전력망 유연성 강화에 주력하고 있다. 주요 선진국들이 앞다퉈 전력망 혁신에 나서는 이유는 에너지안보와 첨단산업 경쟁력 확보를 위해서다.
한국도 7월 31일 재생에너지 잠재력이 큰 지역을 전력망 혁신기지로 조성하고, 전국으로 확대하기 위해 산업통상자원부 주관의 범정부 태스크포스(TF)를 출범시켰다. ‘만드는 곳 따로, 쓰는 곳 따로’인 지금의 중앙집중식 전력망 체계로는 급증하는 전력수요와 재생에너지 확대를 감당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실제로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2024∼2038년)에 따르면 2038년까지 재생에너지는 지금보다 4배 확대되고, 최대 전력수요는 40% 이상 증가할 전망이다. 여기에 기후위기 대응 요구까지 계속 맞물리게 되면, 기존 시스템으로는 전력 계통의 안정성과 효율성을 동시에 확보하는 게 어느 순간부터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합리적 해법 중 하나는 정부가 추진하는 분산형 마이크로그리드, 즉 ‘차세대 전력망’이다. 멀리서 전기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전기를 지역 단위로 직접 생산·저장·소비하는 방식으로 바꾸는 것이다. 먹거리를 동네에서 직접 재배한 후, 소비하고 남으면 보관하는 ‘로컬 푸드’ 개념과 비슷하다.
차세대 전력망 시스템의 장점은 분명하다. 전력망 건설로 인한 원거리 송전비용과 사회적 갈등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우리나라의 첨단 정보기술(IT) 기반 인공지능(AI)과 에너지저장장치(ESS)를 활용하면 날씨에 따라 들쭉날쭉하는 태양광과 풍력의 간헐성 문제를 해소할 수 있다. 재생에너지의 공급 비중이 안정적으로 높아지면 기업은 친환경 ‘RE100’(재생에너지 100% 사용) 목표 달성을 좀 더 쉽게 할 수 있고, 국가적으로는 탄소중립과 에너지안보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다.
새로운 수출 기회도 얻을 수 있다. 한국전력과 민간 에너지기업이 국내 산업단지, 대학 캠퍼스, 군부대, 공항 등에서 차세대 전력망 구축 트랙레코드를 차근차근 쌓아 나가면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지역 맞춤형 전력망 모델을 해외시장에 내놓을 수 있다. 반도체, 조선, 원전처럼 전력망 그 자체가 새로운 효자 상품이 된다는 의미다.
앞으로 한전은 정부와 함께 차세대 전력망 구축 관련 국내 에너지정책과 제도를 정비하면서 글로벌 기술표준 정립에 주력할 생각이다. 나아가 차세대 전력망의 핵심 기술인 마이크로그리드 통합운영 플랫폼(K-MEMS)은 물론이고 태양광, ESS, 전기차 충·방전(V2G) 등 연관산업까지 활성화하는 데 마중물 역할을 하려고 한다. 이를 통해 대한민국 에너지 생태계 전반의 혁신을 이끌어갈 계획이다.
전력망 전환은 단순한 송배전 인프라 교체가 아니다. 기후위기 대응, 에너지안보 강화, 에너지 신시장 개척이라는 3대 국가적 과제를 동시에 해결하는 ‘대한민국의 미래 설계도’다. 정부, 기업, 그리고 국민이 힘을 하나로 모은다면, 한국은 에너지 대전환 시대의 선도국가로 우뚝 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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