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중현 칼럼]3500억弗 대미투자 위기, ‘국가 재정계획’ 다시 세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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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정부 488조 대미 ‘현금 투자’ 압박
李 대통령 “외환위기 사태” “탄핵” 우려
결국 국민 세금으로 갚는 나랏빚 될 것
‘국난’ 상황 대비해 나라살림 돌아봐야

박중현 논설위원
박중현 논설위원
정부가 내놓은 내년도 예산안과 ‘2025∼2029년 국가재정 운용계획’에 따르면 이재명 정부 집권 5년간 나랏빚은 515조 원 늘어날 전망이다. 복지 정책을 확대하고, 코로나 팬데믹에 대응해 돈을 뿌린 문재인 정부의 407조 원보다 100조 원 이상 많다. 내년 정부 지출은 올해 본예산보다 8.1% 급증하고 이후에도 늘어나는데, 세금은 그만큼 안 걷힐 게 확실해 보인다.

이런 재정운용 계획을 세울 때 정부가 예상치 못했던 돌발변수가 발생했다. 관세협상을 통해 한국 정부가 미국에 약속한 3500억 달러의 대미 투자다. 이 대통령은 최근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의 요구조건을) 받아들였다면 탄핵당했을 것” “(한미) 통화스와프 없이 미국 요구를 수용하면 한국은 1997년 외환위기와 같은 사태에 직면할 것”이라고 했다. “합의에 포함된 3500억 달러 펀드는 양국 전략산업 협력의 기반을 공고히 하고, 우리 기업들의 적극적 미국 시장 진출을 도울 것”이라고 했던 7월 말과 완전히 달라졌다.

이 대통령 입에서 ‘탄핵’ ‘외환위기’란 표현이 나온 건 상황이 심상찮다는 방증이다. 당초 정부는 “3500억 달러 펀드 중 일부만 직접투자일 뿐 대부분은 대출, 보증 형태”라고 설명해왔다. 5500억 달러 대미 투자를 약속한 일본 정부와 같은 방식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이달 초 일본이 관세율을 서둘러 끌어내리기 위해 5500억 달러를 ‘직접 투자’하는 내용의 양해각서에 사인하면서 사태가 급변했다.

“한국은 관세를 내든지, 아니면 합의를 받아들이든지 양자택일하라. 일본은 사인했다”는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 발언이 곧이어 나왔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프로젝트를 지정하면, 45일 안에 ‘현금을 쏘는’ 방식에 동의하지 않으면 합의한 상호·품목 관세율 15%를 4월 초 미국이 일방적으로 정한 25%로 되돌릴 수 있다는 공개 압박이었다.

“합의문이 굳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잘됐다”던 한미 정상회담에 대한 대통령실 평가는 우리 정부만의 생각이었다. 우리 협상라인은 당초 일본이 5500억 달러를 직접 투자할 생각이 없다고 판단해 ‘묻어가기’ 전략을 취하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다. 트럼프가 환영한 1500억 달러짜리 ‘마스가(MASGA·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 프로젝트’를 내세워 미국 진출 한국 기업에 대출해주거나, 보증을 서줘 부담을 최소화하려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트럼프의 속내는 그게 아니었다. 우리 정부가 트럼프의 남은 임기 3년 4개월 동안 3500억 달러의 ‘현금’을 마련할 방법은 국채나 국책은행 공채를 발행해 빚을 내는 것뿐이다. 한국은 준(準)기축통화국인 일본과 달리 해외에서 국채를 팔아 달러를 모으기 어렵다. 또 외환보유액의 85%에 해당하는 돈을 단기간에 미국에 보내야 한다면 외환시장에도 큰 탈이 날 것이다.

투자하고 나서도 문제다. 원금을 회수할 때까지 이익을 양국이 나눈다고 하지만, 트럼프가 마음대로 지정하는 프로젝트가 실제 이익을 낼지 미지수다. 이익이 나도 양국이 반반씩 나누는 걸 전제로 연간 수익률 10%일 때 원금 회수에 20년, 4%면 50년이 걸린다. 그동안 우리 국민은 국채이자까지 세금으로 갚아야 한다. 게다가 원금 회수 이후엔 미국이 이익의 90%를 가져가겠다고 한다.

미국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한국인이라도 국가경제를 위험에 빠뜨리고, 미래 세대에 막대한 빚까지 지우면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드는 걸 지원하는 데 동의하긴 어렵다. 이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요청한 대로 한국도 일본처럼 ‘무제한 통화스와프’를 미국과 맺어 위기 시에 달러를 빌려 쓸 수 있게 되면 외환시장의 충격은 완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나랏빚 증가까지 피할 수는 없다. 현 정부에서 늘어날 나랏빚 515조 원에 트럼프 청구서에 적힌 488조 원을 더하면 약 1000조 원이다.

유엔총회 참석차 방미 중인 이 대통령은 어제도 미 상·하원 의원단을 접견하면서 한국이 처한 어려움을 길게 설명했다고 한다. 하지만 트럼프 정부의 평소 독단적 행태를 볼 때 ‘3500억’이란 숫자 자체를 바꾸는 일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고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이 경쟁국 일본보다 10%포인트 높은 대미 관세를 장기간 감내하는 것도 힘들긴 마찬가지다.

정부는 어떻게든 대미 투자 중 직접 투자 비중을 최소화하고, 투자 기간을 늘리면서 우리 기업들의 사업에 투자할 길을 찾아내야 한다. 이와 함께 이전에 세워둔 내년 예산안, 국가재정계획을 원점에서 다시 검토해야 한다. 3500억 달러 ‘트럼프 청구서’는 점점 더 ‘국난(國難)’ 수준의 위기로 발전하고 있다. 일본 경제를 ‘잃어버린 30년’에 빠뜨린 1985년 ‘플라자 합의’에 비견되기도 한다. 허리띠도 졸라매지 않고 닥쳐오는 국난을 이겨내는 건 대단히 어렵다.

#국가재정#나랏빚#대미투자#관세협상#통화스와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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