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부유함과 가난함이 혹여나 아름다움과 추함으로 여겨지는 건 아닐까. 깨끗하고 화려한 고층아파트는 다닥다닥 붙어 있는 달동네 서민들의 집과 종종 비교된다. 그 부유함이 동경의 대상이 된다면 가난함은 멸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이 빈부의 차이는 1970년대 개발시대에 심지어 미추(美醜)의 차이로까지 평가됐다. 부유함이 아름다운 것이라면, 가난은 추한 것이라고. 그래서 어떻게든 가난을 벗어나야 한다고.
최근 개봉한 연상호 감독의 영화 ‘얼굴’은 그 시대의 공기를 담았다. 시각장애를 갖고 태어났지만 아름다운 글씨의 도장을 파는 전각 장인 임영규(권해효 역)와 40년 만에 유골로 돌아온 그의 아내 영희(신현빈 역) 사이에 벌어졌던 사건의 진실을 그 아들인 동환(박정민 역)이 찾아가는 이야기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영희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데, 40년 전 의류공장에서 함께 일했던 이들은 하나같이 영희를 ‘못생겼다’고 말한다. 과연 진짜 영희는 추녀인가.
하지만 이는 맥거핀(MacGuffin·어떤 사실이나 행동을 매우 중요한 것처럼 꾸며 관객들로 하여금 엉뚱한 결말을 상상케 하는 장치)이다. 영희가 추녀인가의 문제보다, 그녀를 추녀라고 말하는 이들이 하나같이 추한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내가 뭐 아름다운 거, 추한 거, 그런 거 구분 못 할 것 같아? 아름다운 건 존경받고 추앙받고, 추한 건 멸시당해.” 영규의 말처럼 영희는 추하다는 이유로 멸시당했는데, 알고 보면 그녀를 멸시한 이들이 추한 자들이다.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하나같이 영희를 ‘못생겼다’ 손가락질했을까. 거기에는 가난은 추하다는 당대의 정서가 숨겨져 있다. 추한 건 영희가 아니라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누군가를 희생시켰던 시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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