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현 서울 중구 태평로 일대. 경성 시민들의 복합문화공간인 경성 부민관이 들어서 있다. 현재는 서울시의회 청사로 사용되고 있다. 사진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근대 경성의 문화 심장, 부민관
“이즈음 준공된 부민관(府民館)의 낙성식 겸 개관식은 예정한 바와 같이 10일 오전 10시 30분부터 성대히 거행하여 동 12시 30분경에 무사히 마치고 계속하여 40분부터 낙성 축하의 연무(演舞)를 공연하였다.” (동아일보, 1935년 12월 11일)》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현재 서울시의회 청사로 사용하고 있는 경성 부민관이 준공했다. 오늘날 시민문예회관의 선구 격인 부민관은 어떻게 건립됐을까? 설계 실무를 담당한 경성부 기사 하기와라 고이치(萩原孝一)는 “쇼와(昭和) 8년(1933년) 6월 경성전기회사로부터 부의 공공사업 시설비로서 100만 원을 기부받아 부에서는 그 반액으로 부민병원을 설립하고 잔액으로 부민들이 다년간 갈망하던 부민관 건설을 기획하게 되었다”고 했다.(‘부민관의 공사에 관하여’ 조선과 건축, 1936년 3월호)
일제강점기 경성전기회사는 전력, 전차 등 전기사업을 독점 운영했다. 하지만 서비스가 극도로 부실해 시민들의 원성이 높았다. 비싼 요금, 낡은 설비, 전력 공급 불안, 전차의 난폭운전과 불친절, 잦은 배차 지연 등 각종 민원이 끊이지 않았다. 당시 언론 등 여론은 문제의 원인으로 ‘대도시의 공공사업을 사기업이 독점하는 구조’를 꼽았다. 이에 따라 경성부가 직접 전기사업을 운영해야 한다는 이른바 ‘경성전기 공영화 운동’이 확산됐다.
동아일보는 1930년 9월 18일 ‘경성전기의 공영’ 제목의 사설을 통해 다음과 같이 전했다. “경성전기회사에 대한 50만 경성부민의 요구는 나날이 커감에 불구하고 회사의 태도는 갈수록 완고하다. 부민은 경성의 전등, 전력, 전열료가 타 도시에 비하여 비교적으로 고가라고 주장한다. 사원의 태도, 설비의 조루(粗漏), 전력의 공급 부정(不整) 등에 대한 불평의 투서가 조상(俎上)에 산적한다. (중략) 현금(現今) 일본의 전기사업을 보더라도 인구 20만 이상의 도회는 거의 시영(市營)이니 경성 같은 대도회에 이것을 경영할 수 없다 하는 것은 너무도 소극적 입론이다. (중략) 적극적으로 이 전기 공영운동을 일으킬 것이다. 이를 위하여는 맹렬한 여론의 환기, 부정(府政)의 감시와 독려 및 최후의 단계에 있어서 견고한 일치 행동으로 회사와 항쟁할 각오가 있어야 할 것이다.”
1930년대 초 시작된 경성전기 공영화 운동은 수년간 이어졌다. 주민대회가 열리고, 각종 매체에 투고가 이어지며 여론이 달아올랐다. 경성부회(지방의회)에서도 이를 둘러싼 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경성전기 측은 경영권을 지키기 위해 총독부는 물론이고 일본 정부를 상대로 로비에 나섰다.
1936년 1월 조선권번 기생들이 부민관 개관 축하 공연을 벌이는 모습이다. 사진 출처 국립중앙도서관결과적으로 공영화는 무산됐다. 그러나 경성전기는 경영권을 유지하는 대신 경성부에 100만 원을 기부하기로 합의했다. 당시 100만 원은 현재 화폐가치로 1000억 원에 이르는 거액이다. 부민관 건립은 이 기부금에서 비롯됐다. 시민운동의 힘으로 독점 대기업의 양보를 얻어낸, 당시로서는 희귀한 사례다.
부민관은 본관 3층, 별관 지하 포함 4층, 시계탑과 게시탑 용도의 9층 고탑 등 세 부분으로 구성됐다. 내부에는 대강당을 비롯해 중·소강당, 특별실, 사교실, 담화실, 집회실, 공중식당, 이발실 등이 들어섰다. 강연회, 연극, 음악회, 무용 공연, 권투 경기, 영화 상영, 전람회, 결혼식까지 다양한 행사를 소화할 수 있는 시설이었다.
연극, 영화, 무용 등 다양한 예술 공연이 펼쳐진 1800석 규모의 부민관 대강당 객석.
사진 출처 국립중앙도서관가장 공을 들인 공간은 대강당이었다. 설계자 하기와라는 “1800석 규모의 고정석을 갖춘 이 강당이 관객의 시선과 객석 간격, 화장실 설비 등에서 조선의 기존 극장들을 능가한다”고 밝혔다. 또한 “일본 도쿄나 오사카의 공회당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수준이 높다”고 설명했다. 당시로는 드물게 냉난방과 환기 장치까지 갖춘 최첨단 ‘복합문화공간’이었다.
1937년 7월호 잡지 ‘조광’은 부민관 대강당을 둘러본 뒤 다음과 같이 평가를 전했다. “현재 일반으로 하여금 경이의 눈으로 보게 하는 부민관 대강당의 무대 구조를 살펴보면 사실로 지금까지 극장다운 극장을 전혀 대해보지 못한 우리 조선의 관객으로 하여금 놀라우리만치 찬란한 근대식 대극장의 형태를 가진 극장임에는 틀림없다. 무대를 요철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3층으로 된 2천에 가까운 객석, 방음장치의 완비, 구비된 조명장치 등등은 일본 내지 같은 곳의 대극장의 설비에 그리 지지 않을 만큼 훌륭한 설비를 하였다고 본다. 그 위에 무대와 관객석의 유기적 연각, 무대상의 거리의 확장, 연기의 크로즈업의 가능성 등의 독특한 기능을 가진 조립식 화도(花道)의 설비가 있고, 무대 전면에는 커다란 오케스트라 박스의 설비까지 있다.”(이운곡 ‘조선 신극운동의 당면과제’)
찬란한 근대식 대극장의 등장은 이전까지 어려웠던 시도를 가능하게 했다. 그간 소극장 무대에서 사회 비판적 리얼리즘 연극을 추구해온 극예술연구회는 1937년 9월 부민관에서 대형 악극 ‘춘향전’을 올려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해당 작품의 연출자 유치진은 “지금까지 레알리즘에만 충실했던 작품은 빈데가 있고 기름기가 없어 빡빡하기만 하다”며 “레알리즘에만 구속되지 말고 좀 더 인간의 자유로운 감정, 공상, 희망, 분노 등을 담은 로맨틱한 수법이라야 일반 독자나 관중을 어필할 수 있다”고 밝혔다.(‘낭만성 무시한 작품은 기름 없는 기계’ 조선일보, 1937년 6월 10일) 부민관 무대는 바야흐로 식민지 수도 경성에서도 막 꽃피기 시작한 도시 대중문화를 담아내는 그릇이 됐다.
그러나 춘향전이 무대에 오르기 한 달 전인 1937년 8월, 일제가 중일전쟁을 벌이면서 조선도 전시 동원 체제로 빨려 들어갔다. 이로 인해 부민관 무대는 오락이나 흥행 대신 ‘국책 선전물’ 공연으로 채워졌다. 전쟁 동원을 위한 크고 작은 행사도 이어졌다.
1945년 7월 24일 부민관에서는 ‘아시아민족분격대회(亞細亞民族憤激大會)’가 열렸다. 일본과 조선, 대만, 만주국은 물론이고 일제가 세운 미얀마, 인도네시아의 괴뢰정부 대표들까지 초청된 관제 행사였다. 그러나 대회가 한창이던 중 부민관은 폭발음이 울리며 아수라장이 됐다.
해당 사건은 일본 당국의 철저한 보도 통제로 끝내 신문에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내외 귀빈과 총독부 수뇌부가 모두 참석한 행사의 경비가 허술하게 뚫렸다는 사실을 당국이 공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건의 전모가 밝혀진 것은 광복 이후였다. 대한애국청년당 소속 청년 3명이 일제 요인들을 암살하기 위해 연단 밑과 화장실에 설치한 사제 폭탄이 터진 것이었다. 훗날 ‘부민관 폭파 의거’라 불리게 된 사건이다.
의거 주모자인 조문기(1927∼2008)는 훗날 ‘내가 겪은 해방과 분단’(2001년)을 통해 이렇게 회고한다. “부민관 폭파 사건이란 것은 당초 계획에 없었어요. 거리에 벽보가 나붙고 아침저녁으로 뉴스 보도를 하고, 신문에도 커다랗게 나오고, 며칠 몇 시에 아시아분격대회를 한다는 거죠. (중략) 길을 건너면 조금 아래쪽이 시청이에요. 그때는 시청 울타리가 뭐냐 하면 돌기둥을 이만큼 세워서 철로 된 줄을 한 줄인가 죽 이어 놨다고. 셋이 거기에 앉아 가지고 시계 보고 있는 거예요. 정확하게 3분 있다가 터지게 되어 있으니까. 기술자도 아닌데 어떻게 신통하게 딱 계획한 대로 정확하게 연달아 탕탕 터지더라고. 그러니까 완전히 성공을 한 거지. 한밤중에 태평로에서 쾅쾅 터지니까 소리가 요란하잖아요? 그 폭음이 금방 무너지는 것 같더라고.”
당일에는 누구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불과 20일 뒤면 일본의 패전과 조선의 광복이 찾아올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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