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서영아]‘EU 수준의 한일 경제공동체’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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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아 콘텐츠기획본부 기자·국장급
서영아 콘텐츠기획본부 기자·국장급
‘각자도생(各自圖生)’이 시대적 화두가 된 요즘, 재계 일각에서 일본과의 경제 연대를 통해 성장동력을 만들자는 제안이 나와 관심을 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최근 일본 요미우리신문 인터뷰에서 “한일 양국이 유럽연합(EU) 수준의 경제공동체로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치와 이익을 공유하는 두 나라가 힘을 합친다면 미국, EU, 중국에 이은 세계 4위 경제권을 형성해 새로운 성장모델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는 근래 기회 닿을 때마다 비슷한 얘기를 하고 있는데, 갈수록 현실감이 커지는 느낌이다. 이재명 대통령도 대선후보 시절 이런 제안에 “어쩌면 그렇게 저랑 생각이 똑같습니까”라고 화답한 바 있다.

트럼프발 관세전쟁과 보호무역주의 바람 속에 글로벌 공급망이 흔들리자 한국 정부는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을 추진하고 있다. 가입국끼리라도 미중 무역 의존도를 완화하고 공급망 안정을 도모하겠다는 취지다. 최 회장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자는 것이다.

獨·佛 엘리제 조약에서 배울 점

한국과 일본은 여러모로 처한 상황이 유사하다. 극심한 저출산 초고령화와 인구 감소, 그리고 저성장이 예고돼 있다. 양국 내수시장을 합친다면 아무리 인구가 감소 중이라 해도 1억7000만 명 규모다. 이 시장을 공유하며 에너지나 반도체 등 첨단산업에서 협력한다면 성장의 단초를 열 가능성이 커진다. 일자리 수급의 미스매칭도 인재풀이 커질수록 융통성이 생길 것이다. 대한상공회의소는 EU 회원국 간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한 솅겐 조약을 참조한 ‘한일판 솅겐 조약’을 제안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악마는 디테일에 있는 법. 구체적인 여건은 녹록지 않아 보인다. 뿌리 깊은 역사 갈등은 물론, 새로운 갈등과 부작용이 적지 않게 나타날 것이다.

이런 때 생각나는 것이 1963년 1월 서독과 프랑스가 맺은 엘리제 조약이다. 조약은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당시 72세)과 콘라트 아데나워 서독 총리(당시 87세)가 수십 번의 만남과 토론을 거친 산물이었다. 당시 양국은 현재의 한국과 일본처럼 주변 환경의 불확실성이 가득하다고 느꼈다. 안보 분야에서 미국은 신뢰감을 주지 않았고 분단국가였던 독일은 소련의 직접 압박을 느꼈다. 이웃나라와의 관계를 튼튼하게 다져야 했다. 이 조약으로 양국은 수세기에 걸친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화해 협력을 다짐했다.

조약 이후 양국 정상은 1년에 2회 이상, 외교·국방부 장관들은 4회 이상, 교육·청소년 정책 담당자들은 6회 이상 정기모임을 통해 긴밀한 협력을 유지했다. 2003년 조약 체결 40주년에는 양국 청소년 의회의 제안으로 공동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작업이 시작돼 훗날 3권의 역사교과서가 완성됐다. 엘리제 조약 정신은 EU 탄생의 원동력이 되었다.

더 큰 세상에서 청년들 가능성도 열려

청년들은 더 큰 시장과 기회의 장을 얻을수록 더 많은 선택지를 가질 수 있다. 기적과도 같았던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상기해 보자. 우리 선수들은 월드컵 주최국이라는 판이 깔리자 놀라운 기량을 발휘해 4강까지 올라갔다.

이 공동 개최는 한일 민간인 네트워크인 ‘한일(일한)포럼’이 1995년 양국 정부에 공동 개최를 촉구하는 성명을 내면서 길을 연 것으로 평가받는다. 오와다 히사시(小和田恒·93) 당시 일본 측 의장이 2022년 도쿄에서 열린 제7회 한일포럼상 수상식에서 그 시절을 회고했다.

“일본이 유리한 상황인데 왜 그러느냐며 항의 전화가 쏟아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결국 공동 개최가 실현돼 한국이 준결승에 오르자 이번엔 ‘공동 개최니까 일본도 한국을 응원하자’는 전화가 왔다. 잘했다고 생각했다.” 엘리트 외교관 출신으로 현 나루히토(德仁) 일왕의 장인이기도 한 그는 이날 한일관계에 대해 “현실 분석만 하지 말고 희망을 찾아 실행에 옮겨야 한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한일 경제공동체#CPTPP#엘리제 조약#한일판 솅겐 조약#저출산#초고령화#한일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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