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유재동]이천 쌀집의 폭발적 인기가 씁쓸한 이유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9월 25일 23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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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동 산업1부장
유재동 산업1부장
억대 성과급으로 일약 원톱 ‘신의 직장’ 반열에 오른 SK하이닉스가 이번 주부터 신입 채용 서류를 접수하고 있다. 취준생은 물론이고 대기업 저연차 직장인들도 관심이 뜨겁다. 얼마 전부터 소셜미디어에는 하이닉스의 직급별 연봉에 성과급을 합산한 자료가 돌아다니고 있다. 블라인드와 취업 사이트에는 “성과급만 웬만한 대기업의 부장 연봉 수준인 꿈의 직장”, “다니던 회사 때려치우고 그 회사 신입으로 들어가도 더 많이 벌겠다”는 글들이 쏟아진다. ‘대학생 입사 선호 1위’ 이천 쌀집(경기 이천에 본사를 둔 하이닉스의 별칭)의 인기가 심상치 않다.

소수 양질의 일자리만 구직자 몰리는 현실

연봉과 처우가 우수한 회사에 구직자가 몰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런 풍경에는 뭔가 찝찝한 구석이 있다. 하이닉스는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을 선점하며 역대급 영업이익을 내고 있다. 실적이 좋으면 사람을 더 뽑을 법도 하지만 하이닉스는 오히려 최근 들어 청년들에 대한 채용을 줄여 왔다. 전체 신규 채용 중 20대 채용 비중은 2022년 75%에 달했지만 2024년에 40%(942명 중 379명)로 뚝 떨어졌다. 비단 하이닉스뿐만이 아니다. 주요 대기업들이 청년들에게 제공하는 질 좋은 일자리는 계속 쪼그라드는 추세다. 마음에 드는 직장이 없어 구직을 단념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청년 고용률은 16개월 연속 하락세를 이어오고 있다.

대기업들이 정규직 고용에 인색한 이유는 인재가 필요하지 않아서도, 청년들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해서도 아니다. 무엇보다 사람을 뽑아 유지하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선 한 번 정규직 직원을 뽑으면 아무리 근무 성적이 저조해도 정년 60세까지 해고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제임스 김 암참 회장은 최근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사업이 잘될 때는 직원을 많이 뽑고, 잘되지 않을 때는 줄여야 하는데 한국에선 그게 안 된다”며 “싱가포르 같은 작은 나라에 글로벌 기업의 지역 본부가 5000곳 있는데 한국에 100곳도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이겠느냐”고 반문했다. 호봉제 같은 시대착오적인 임금 체계도 문제다. 해마다 따박따박 연봉이 오르는 구조 때문에 신입을 뽑아놓으면 시간이 갈수록 기업들의 부담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기업들이 공채 대신 수시 채용으로 선회하고, 대졸 신입보다 중고 경력직 채용을 선호하게 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하이닉스 열풍은 소수 양질의 일자리에만 구직자가 몰리고 이 바늘구멍 전쟁에서 탈락한 패배자들은 취업 재수 삼수를 반복하는 암담한 현실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다. 대-중소기업의 임금 격차가 급격하게 벌어지고, 커리어 전환을 통한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무너진 상황에서 처음부터 어떻게든 높은 자리에서 경력을 시작하는 것이 본인에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정부와 정치권은 가뜩이나 높은 대기업 정규직의 울타리를 더 높이는 작업에 열을 올린다. 임금 삭감 없는 주4.5일제와 정년 연장, 노란봉투법은 모두 기업들의 채용 의지를 크게 떨어뜨리게 하는 요인들이다. 얼마 전 대통령의 요청에 주요 기업들이 신규 채용을 늘리겠다고 화답한 것은 모양새는 훈훈해 보였을지 몰라도 그 본질은 기업에 대한 무리한 팔 비틀기라는 것을 누구나 안다.

노동개혁이 청년 취업난의 근본 해법

일자리는 기업의 성장과 기술 혁신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게 돼 있다. 정부가 할 일은 기업들에 채용을 읍소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시장의 기득권 과보호를 해소하고 낡은 임금체계를 확 뜯어고치는 노동개혁에 나서는 것이다. 정부가 앞장서서 그런 고용 친화적 환경을 조성하기는커녕 스스로 일자리의 파괴자가 돼서는 안 되지 않겠나. 기업들 사이에서 “직원 적게 뽑는 건 지능순”이라는 말이 왜 나오는 것인지 진지하게 성찰해 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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