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상훈]간병비 급여화, 시간에 쫓길 일이 아니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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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정책사회부장
이상훈 정책사회부장
“저승에서 빨리 데리러 와야 하는데….”

2015년 일본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이자 NHK 드라마의 원작 소설 ‘왜 자꾸 죽고 싶다고 하세요, 할아버지’(하다 게이스케 지음)에서 주인공 겐토의 할아버지가 입에 달고 사는 말이다. 죽고 싶다는 노인의 말은 밑지고 판다는 장사꾼 말, 결혼하지 않겠다는 젊은이 말과 함께 3대 거짓말이라지만 겐토는 생각이 묘해진다. ‘저 말이 진심이라면, 내가 도와야 하지 않을까.’

누구보다 열심히 재활하는 할아버지가 죽고 싶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는 장면은 노년 심리와 사회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육체적 통증 속에서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갈망하는 모습, 간병 때문에 경제적 심리적으로 바닥을 치는 가족 고통은 공적 돌봄 시스템이 부족한 날것 그대로의 현실을 보여준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건보 지원 정책’

병든 가족을 돌보다 산 사람까지 잡는 간병 지옥, 간병 파산을 막기 위해 정부는 간병비 급여화를 추진하고 있다. 중증 이상 환자에게 100%인 본인 부담률을 30% 내외로 낮추면 개인은 월 60만∼80만 원 안팎의 간병비를 부담하면 된다. 간병의 가장 큰 어려움인 경제적 고통을 많이 덜어줄 수 있다.

문제는 단순한 보장 강화만으로 급증하는 간병 수요와 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는 점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2035년이면 한국의 65세 이상 인구 비중은 30%를 넘어선다. 이미 지난해 고령 인구의 건보 진료비 총액(52조1221억 원)이 4년 전보다 40% 증가하며 전체 진료비의 절반에 육박하는 수준이 된 걸 돌이켜 보면 간병비 급여화는 건보에 막대한 부담을 늘릴 가능성이 크다.

한국 장기요양보험에 해당하는 일본 개호보험 급여 규모가 2000년 3조3000억 엔에서 2022년 11조 엔으로 3배 이상으로 늘어난 모습은 한국의 미래가 될 수 있다. 막대한 재정 부담은 결국 보험료 인상으로 이어져 국민연금에 이어 세대 갈등을 키울 위험이 크다. ‘간병이 어려우니 건보로 지원하자’는 정책은 그래서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단순한 보장 강화를 넘어 노인들의 요양 수요 자체를 줄이는 정책이 필수다.

요양원에서 생애 마지막을 보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누구보다 노년층 본인이 강하다. 하지만 어떻게 건강을 유지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게을러서가 아니다. 시스템이 없어서다. 고혈압, 당뇨, 관절염 등 흔한 만성 질환조차 체계적 관리가 안 돼 하루에만 10개 이상 약을 2개월 이상 복용하는 사람이 국내에 136만 명이다. 주민센터 건강체조, 노인복지관 낙상 예방 교육 등 건강 증진 프로그램이 늘었다고는 하지만, 요양 시설 수요를 줄일 정도의 수준에는 여전히 부족하다.

내년 3월 전면 시행되는 통합 돌봄을 놓고는 현장에서 우려하는 목소리가 크다. 의사가 많은 수도권은 현관문 밖 이웃 간 장벽이 너무 높고, 지역 커뮤니티가 그나마 살아 있는 지방에서는 보건소를 지킬 의사조차 턱없이 부족하다. 정보기술(IT), 간호사 등 의사 대체 인력, 이동 진료 차량 등을 활용한 다양한 비대면 원격 진료가 선진국에서 시행되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제대로 된 논의조차 이뤄지고 있지 않다.

병원 입원 부추기는 현실 개선해야

간병비 급여화 정책은 초고령사회에 접어든 한국에 꼭 필요하다. 하지만 ‘간병 보장-건강 증진-효율적 자원 활용’이라는 선순환을 초기에 제대로 구축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개선을 시도하기조차 힘든 거대한 밑 빠진 독이 될 수 있다. 간병비 지원이 병원 입원을 부추기고 부실한 간병 현실을 개선하지 못한다면, 환자와 가족의 고통은 줄어들기 어렵다. 현장의 비효율을 해소하는 것에서부터 간병 급여화 정책의 스타트를 끊어야 한다. 국민의 존엄한 삶과 직결된 문제다. 시간에 쫓겨 급하게 추진할 정책이 아니다.

#노년 심리#간병비 급여화#공적 돌봄 시스템#고령화#장기요양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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