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C 리얼리티쇼에 등장한 한복과 태권도복[폴 카버 한국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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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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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카버 영국 출신·번역가
폴 카버 영국 출신·번역가
여름 휴가철 바다를 찾은 독자라면 알 것이다. 같은 해변이라도 어느 날은 서핑을 할 만큼 파도가 크게 일고, 또 어떤 날은 어린아이도 헤엄칠 수 있을 정도로 잔잔할 때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한류 콘텐츠도 비슷하다. 가수 싸이의 히트곡 ‘강남스타일’이나 넷플릿스 오리지널 드라마 ‘오징어 게임’처럼 전 세계를 휩쓴 블록버스터급 콘텐츠가 있는가 하면, 규모는 작지만 생활 깊숙이 스며든 콘텐츠도 있다.

필자가 한국으로 온 2007년만 해도 영국인들은 한국 문화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슈퍼마켓 외식 코너에서 한국 음식을 쉽게 살 수 있고, 웬만한 도시의 영화관에서는 한국 영화를 정기적으로 상영한다. 대학이나 한인회는 매년 한국 음식 판매대를 갖추고 K-댄스 공연 등 문화 행사를 연다.

최근에는 한국의 독특한 소재와 문화를 활용하면서도 인류 보편적 정서에 호소하는 영국 리얼리티 TV쇼가 잇달아 등장하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이 리얼리티쇼를 소개하기에 앞서 양국의 TV 프로그램 차이를 간단히 짚어 볼 필요가 있다. 필자의 체감으로는 영국 드라마는 비교적 투박하고 서민적인 소재가 많고, 한국 드라마는 극적인 전개와 화려한 배경을 선호하는 편이다. 리얼리티쇼도 마찬가지다. 한국 리얼리티쇼는 유명 연예인 등이 다수 출연하지만, 영국 리얼리티쇼는 대부분 일반인 중심으로 제작된다는 특징이 있다.

영국의 대표적 리얼리티쇼를 꼽자면 세 갈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꿈꾸던 집을 짓거나 오래된 주택을 개보수하는 주거·건축 프로그램, 두 번째는 요리 경연 프로그램, 세 번째는 그림 그리기·사교댄스처럼 고상한 취미를 소재로 한 경연대회를 모티브로 한 것들이다. 필자의 어머니도 이런 리얼리티쇼를 즐겨 본다. 특히 한국적 소재가 등장하는 장면은 절대 놓치지 않으신다. 예를 들어 영국의 ‘마스터셰프 UK(Celebrity MasterChef UK)’에서는 참가자들이 맛만 보고 한국식 프라이드치킨의 재료를 알아맞혀야 한다든지 ‘스트릭틀리 컴 댄싱(Strictly Come Dancing)’ 프로그램에서 한 참가자가 싸이의 ‘강남스타일’에 맞춰 살사댄스를 선보이는 장면 등이다.

최근 영국에 새롭게 등장한 리얼리티쇼는 기존의 주제를 벗어나 다소 파격적으로 한국을 테마 삼아 경연대회를 펼쳤다. BBC에서 방영한 ‘위대한 영국의 바느질꾼(The Great British Sewing Bee)’이란 프로그램이다. 매회 약 400만 명이 시청하는 이 프로그램에선 12명의 아마추어 재봉사들이 특정 주제에 맞춰 세 벌의 옷을 디자인하며 경쟁한다.

첫 번째 라운드는 패턴 챌린지였다. 참가자들에게 한복 저고리를 만드는 과제가 주어졌다. 이 라운드에서는 바느질 실력뿐 아니라 전통의 미를 현대적으로 조화시켜 현대 여성의 실루엣으로 재해석하는 능력이 요구됐다. 적잖은 참가자들이 낯선 한복 패턴을 따라 바느질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두 번째 라운드는 변형 챌린지였다. 참가자들은 태권도복을 다양한 색상의 띠를 활용해 혁신적인 의상으로 변신시켜야 했다. 과제의 핵심은 한국 전통 무술복의 특징을 살리면서도 역동적인 움직임이 가능한 옷을 만드는 것이었다. 마지막 라운드 과제는 철릭(조선 시대 군인·관리들이 입던 전통 외투)을 변형해 여성용 맞춤 드레스를 제작하는 것이었다. 마지막 미션이야말로 한국 전통의상의 특성을 가장 충실히 살려야 하는 도전이었다.

필자는 바느질 실력이 뛰어난 어머니께 “한국 전통의상을 소재로 한 옷을 직접 만들어 볼 생각이 있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어머니는 “전통 한복이든 현대식 한복이든 동네에서 입기엔 지나치게 화려하다”면서도 “한복 문양은 디자인이 섬세해 제작이 까다롭다”고 하셨다. 영국에서는 바느질이 인기 있는 취미다. 특히 팬데믹 이후 취미로 바느질을 즐기는 사람이 크게 늘었다. 이런 흐름과 함께 영국에서 한국풍 의상이 더 많이 디자인될 수 있지 않을까.

반면 한국은 사정이 다르다. 20년 전만 해도 동네마다 실이나 십자수 가게가 있었지만, 이제는 거의 자취를 감췄다. 한국 바느질의 전통이 한국이 아닌 영국에서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물론 영국의 ‘한국 바느질 열풍’이 일시적 유행으로 끝날 수도 있다. 하지만 영국의 인기 리얼리티쇼에서 한국 전통의상이 메인 주제로 다뤄지는 모습을 보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머지않아 영국 민영 채널4의 인기 프로그램 ‘영국의 위대한 제빵사(The Great British Bake Off)’에서 무지개떡과 약과, 호떡을 재해석하는 요리 대결이 펼쳐지고 ‘위대한 건축(Grand Designs)’이란 리얼리티쇼에서 한옥을 짓는 방송이 방영될 날이 올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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