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중혁 팔로알토캐피탈 대표《“오라클 클라우드 인프라(OCI) 매출은 향후 4년간 8배 성장해 1440억 달러에 이를 것입니다.” 9월 오라클 최고경영자(CEO) 새프라 캐츠의 ‘폭탄 선언’에 월가는 술렁였다. ‘늙은 공룡’, ‘올드테크’로 취급받던 거인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오라클은 인공지능(AI) 시대의 개막과 함께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MS), 구글 같은 신흥 강자들에 밀려 조롱을 받았다. 2025년 들어 주가가 80% 이상 폭등하며 사상 최고치를 경신한 오라클은 이제 단순한 데이터베이스(DB) 회사가 아닌, AI 혁명의 심장부를 뛰게 하는 핵심 인프라 기업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상승의 배경은 명확하다. 엔비디아 그래픽처리장치(GPU)를 탑재한 OCI가 생성형 AI 기업의 핵심 인프라로 자리 잡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오픈AI, 코히어, xAI 등이 오라클과 파트너십을 맺었고, 앤트로픽과 미스트랄은 자사 모델을 오라클 DB나 서비스와 연동하거나 제3자 파트너십을 통해 협력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세일즈포스, 시스코, 지멘스 같은 전통 대기업들도 고객으로 확보했다. 특히 OCI는 아마존웹서비스(AWS), 애저, 구글 클라우드보다 GPU 공급 속도와 가격 경쟁력이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늦깎이’ 클라우드, 차별화로 승부수
2018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오라클 오픈월드’ 행사에서 래리 엘리슨 오라클 회장이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 출처 오라클 홈페이지1977년 래리 앨리슨이 창업한 오라클은 지난 40여 년간 전 세계 DB 시장의 절대 강자로 군림해 왔다. 1980, 90년대에 걸쳐 ‘관계형 DB(RDBMS)’ 시장을 사실상 지배하며 IBM, SAP 등과 함께 글로벌 정보기술(IT) 산업의 ‘왕좌’를 차지했다. 금융·제조·통신 등 주요 산업의 핵심 시스템이 오라클 DB 위에서 구동됐고, 기업 고객은 특정 업체에 종속되는 이른바 ‘벤더 록인(vendor lock-in)’에 묶였다. 2000년대 들어 소프트웨어 라이선스와 유지·보수 계약은 오라클에 막대한 현금 흐름을 안겨줬다.
그러나 2010년대 들어 IT 업계는 클라우드라는 거대한 패러다임 전환을 맞았다. AWS가 선도하고 MS 애저, 구글 클라우드가 뒤를 이으며 기업들은 자체 서버 대신 클라우드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오라클은 온프레미스(On-Premise·사내망) 시장의 성공에 안주하며 변화에 늦게 대응했다. 2016년이 돼서야 본격적으로 클라우드 인프라 사업에 뛰어들었고, 초기에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시장 점유율은 한 자릿수에 머물렀고, ‘클라우드 시대의 패자’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하지만 엘리슨 회장은 “우리는 2세대 클라우드를 만들 것”이라며 포기하지 않았다. 2020년을 기점으로 반전이 본격화됐다. 오라클은 ‘OCI 2세대’를 선보이며 후발 주자의 약점을 기술력으로 정면 돌파하는 전략을 택했다.
오라클은 단순히 인프라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강점인 DB와 애플리케이션을 클라우드와 완벽히 통합하는 ‘풀스택 클라우드’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특히 ‘자율 DB’ 기술은 게임체인저였다. 머신러닝을 활용해 자동으로 튜닝, 보안, 백업, 복구를 수행하는 이 기술은 인간 개입 없이도 100% 가까운 가용성을 보장했다. 이는 DB 관리자의 업무를 획기적으로 줄이면서도 성능과 안정성을 극대화하는 혁신이었다.
또한 경쟁사 대비 뛰어난 성능과 낮은 비용을 무기로 내세웠다. 특히 여러 서버의 자원을 직접 연결해 데이터 전송 속도를 극대화하는 ‘원격 직접 메모리 접근(RDMA)’ 네트워크 기술은 대규모 데이터 처리가 필수적인 AI 워크로드에 최적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시장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오라클의 AI 전환은 엔비디아와의 긴밀한 협력으로 가능해졌다. 2023년부터 오라클은 H100, B100 GPU를 대규모로 도입했고, 2025년에는 차세대 GB200 슈퍼칩을 최초로 OCI에 적용한 클라우드 사업자 중 하나가 됐다. 이 전략은 오픈AI와 MS가 독점적으로 협력하는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AI 스타트업들에 매력적인 대안이 됐다.
골드만삭스는 “AI 스타트업들이 오라클을 선택하는 가장 큰 이유는 속도와 가격이며, GPU 공급 병목이 극심해지면서 오라클의 협상력이 높아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엘리슨 회장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는 최근 실적 발표에서 “우리는 단순히 클라우드를 파는 회사가 아니라, AI 시대의 필수 인프라를 제공하는 기업으로 변모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2025년 들어 오라클의 AI 전략이 본격적으로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2025년 9월 오라클은 오픈AI와 텍사스 애빌린에 GW(기가와트) 규모의 AI 훈련 데이터센터를 구축하는 ‘스타게이트(Stargate)’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이어 오픈AI와 약 3000억 달러 규모의 대규모 계약을 체결하며 미국 내 4.5GW 규모의 스타게이트 데이터센터 용량을 개발하기로 했다. 이는 AI 시대의 국가 인프라 구축 프로젝트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오라클이 단순한 인프라 제공자가 아닌 AI 시대의 핵심 파트너로 진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OCI의 슈퍼클러스터는 베어메탈(물리적 서버 하나를 통째 제공) 성능과 저지연 인터커넥트에 최적화돼 있으며, 대형언어모델(LLM) 훈련에 필요한 막대한 컴퓨팅 파워를 제공한다.
클라우드 ‘빅3’와의 여전한 격차
물론 오라클의 앞길이 탄탄대로인 것만은 아니다. 가장 큰 우려는 여전히 클라우드 ‘빅3’(AWS, 애저, 구글 클라우드)와의 격차다. 시장조사업체 시너지리서치에 따르면 2024년 말 기준 오라클의 글로벌 클라우드 인프라 점유율은 약 3% 수준이다. AWS 30%, MS 애저 20%, 구글 클라우드 13%와 큰 격차가 있다. AI 특수로 단기적인 성장을 이뤘지만, 이를 시장 전체의 지배력으로 연결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경쟁사들의 반격도 거세다. AWS, 구글, MS 모두 자체 AI 칩 개발과 인프라 확충에 천문학적인 자금을 쏟아붓고 있다. 특히 MS와는 클라우드 간 상호 연결 서비스를 제공하는 ‘적과의 동침’ 관계를 맺고 있지만, AI 시장의 주도권을 둘러싼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AI 수요가 일부 거대 AI 기업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도 리스크 요인이다. 이들 핵심 고객이 자체 데이터센터 구축을 확대하거나 다른 클라우드로 이전할 경우 실적에 타격을 입을 수 있다. 천문학적인 데이터센터 확충에 필요한 자본 지출(CapEx)을 어떻게 지속적으로 조달할 것인지도 재무적인 부담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올드테크의 귀환, 신화 계속될까
오라클은 한때 월가의 레이더에서 사라졌던 기업이다. 하지만 지금은 숨은 AI 수혜주로 꼽히기 시작했다. 과거의 제국은 여전히 막대한 고객 기반과 현금 흐름을 갖고 있으며, 후발 주자의 불리함을 오히려 AI 특화 인프라 전환으로 뒤집었다. 엔비디아나 팔란티어처럼 화려한 주목을 받지는 않지만, AI 인프라의 핵심을 차지하며 조용히 성장하고 있다.
오라클의 부활이 단순한 반짝 현상이 될지, 아니면 클라우드와 AI 인프라의 새로운 강자로 자리 잡을지는 앞으로 2, 3년 안에 판가름 날 것이다. 엘리슨 회장은 “AI 시대의 필수 인프라 제공자”라는 방향으로 회사를 이끌고 있다. AI 인프라의 판도가 새롭게 짜이고 있는 지금, 오라클은 다시 월가를 흔들고 있다. 월가가 화려했던 제국의 부활 몸짓에 어떤 평가를 내릴지, 투자자들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필자(최중혁)는 미국 미시간대 경영학석사(MBA) 학위를 받은 뒤 삼성SDI America, SK Global Development Advisors 등을 거쳐 미 실리콘밸리 소재의 사모펀드 팔로알토캐피탈(Palo Alto Capital)을 설립해 운용하고 있다. ‘트렌드를 알면 지금 사야 할 미국 주식이 보인다’ ‘2025-2027 앞으로 3년 미국 주식 트렌드’ 등의 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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