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영 역사작가나당 연합군이 백제의 수도 사비성을 공격했을 때 의자왕은 웅진성으로 달아났다. 웅진성은 예씨 일족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이들은 백제에 더 이상 희망이 없다 생각하고 의자왕과 태자를 체포해 당나라에 바쳤다.
앞장선 사람은 예씨 형제였다. 좌평 예군과 웅진방령 예식진은 이 공으로 당의 벼슬을 받았다. 또 그 후 당에 충성한 결과 예군은 우무위장군(정4품), 예식진은 좌위위대장군(정3품)이라는 높은 벼슬로 승진했다. 예군은 왜에 사신으로 가기도 하고, 신라와 당이 고구려를 정벌하려 할 때 신라에 사신으로 가 고구려 정벌을 위한 합의를 도출했다. 서로 믿기 어려운 처지인지라 인질을 교환하기로 했으나 백제부흥군이 신라군을 계속 공격하자 신라를 정탐하러 온 스파이로 오해받아 2년 동안 감옥에 수감되기도 했다. 나당전쟁에서 패한 당에 신라 문무왕이 화해의 제스처로 포로 석방을 할 때, 예군도 풀려나 당에 갈 수 있었다.
예군은 백제에서 최고위 신분인 좌평이었다. 그런 자가 나라가 멸망의 백척간두에 섰을 때 나라를 구할 생각을 하기는커녕 왕을 잡아 적국에 바치는 결정적인 배신행위에 앞장섰다.
의자왕은 말년에 귀족들을 대거 숙청하면서 왕권 강화에 나섰다. 하지만 예씨 일족은 숙청 대상도 아니었다. 그들이 옛 수도였고 방어에 최적화된 웅진성을 지키는 의자왕의 심복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배신의 대가는 달콤했다. 예씨 일족은 투항 이후 당나라에서 고위 관리를 지내며 내내 편안하게 살 수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자신들의 조상을 중국인으로 날조했다. 예군은 자기 집안이 300년대 초반에 백제로 이주했다고 말하고, 2세대 예소사는 400년대에, 3세대 예인수는 600년대 초반에 백제로 이주했다고 적었다. 세대가 내려갈수록 백제로 간 연대가 짧아지는데, 자신들이 중국에서 건너온 지 얼마 안 되기 때문에 백제보다 중국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이었다. 나라를 배반하고, 정체성마저 지워버린 셈이다.
예씨 일족 치욕의 역사는 이들이 스스로 남긴 묘지명에 낱낱이 적혀 있다. 묘지명은 무덤에 넣는 기록으로 돌에 새겨져 있어서 세월의 흐름을 견딜 수 있다. 예군은 678년 2월 1일에 자신의 집에서 숨졌고, 당 황제의 애도를 받으며 무려 6개월간의 장례 기간을 거쳐 10월 2일에 장례를 치렀다. 그는 과연 자신의 선택에 만족하며 눈을 감았을까?
역사는 오늘날에도 같은 질문을 던진다. 위기의 순간,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당장의 생존과 출세를 위해 권력에 몸을 의탁할 것인가, 아니면 공동체의 명예와 정체성을 지킬 것인가. 정권이 바뀔 때마다 하루아침에 충성의 방향이 바뀌는 정치, 강대국에 줄을 서는 데만 몰두하는 외교, 지도층이 눈앞의 이익을 위해 공동체를 저버리는 행태…. 모두 예씨 일가의 그림자를 닮았다.
예씨 일가는 생전 영화를 누렸지만, 역사의 기록에서 그 이름은 ‘출세한 가문’이 아니라 ‘나라를 끊어먹은 집안’으로 남았다. 단기적인 이익은 오래가지 않는다. 후대의 평가와 공동체의 기억은 매섭다. 백제 말기의 예씨 일가를 돌아보며 우리는 자문해야 한다. 오늘의 선택이 후대에 어떤 이름으로 남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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