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정임수]기재부 죽이고 금융위 살린 ‘묻지 마’ 개편

  • 동아일보

코멘트
정임수 논설위원
정임수 논설위원
이재명 정부가 기획재정부 해체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덩달아 수술대에 올린 게 금융위원회·금융감독원이다. 대선 유세 과정에서 “금융위에 감독과 정책 업무가 뒤섞여 있어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금융 조직 개편이 시작됐다. 이렇게 해서 확정된 것이 기재부를 재정경제부와 기획예산처로 쪼개고, 금융위는 금융 정책 기능을 재경부에 넘긴 뒤 금융감독위원회로 재편하는 방안이다. 그 밑에 금감원을 분리해 신설 금융소비자보호원을 함께 두겠다고 했다.

일방통행 조직 개편, 국민 신뢰 갉아먹어

그런데 지난주 정부조직법 개정안 처리를 불과 3시간 앞두고 정부와 여당은 금융위·금감원 개편을 없던 일로 만들었다. 최장 6개월이 걸리는 패스트트랙(신속처리 안건) 지정까지 불사하겠다고 해놓고선 하루아침에 태도를 바꾼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경제 위기 상황에서 금융 조직을 장기간 불안정한 상태로 둘 수 없다” “야당 반대에 따른 불가피한 결정”이라는 이유를 댔지만, 실제로는 금융계의 거센 반발과 준비 부족이 겹친 탓이 크다.

당초 금융 정책과 감독 기능을 4곳(재경부·금감위·금감원·금소원)으로 쪼개는 것을 두고 업무 중복과 혼선을 가중시키고 위기 대응 능력을 떨어뜨린다는 비판이 컸다. 금융사 입장에선 시어머니만 4명이 돼 관치 부담을 키운다는 불만이 쏟아졌다. 그런데도 조직 개편 당사자는 물론이고 금융 현장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은 없었다. 조직 분리를 위해선 9000개가 넘는 법조문을 개정해야 하는데, 기본 설계조차 없어 최근까지 금융당국 직원들이 일일이 조항을 분리 검토하는 작업을 했다고 한다.

이는 새 정부의 금융 조직 개편이 얼마나 졸속으로 추진됐는지 보여주는 단면이 아닐 수 없다. 금융당국 직원들과 금융회사, 소비자 모두에게 공감을 얻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금융당국 쪼개기라는 개악은 피했지만, 일방통행식으로 개편을 밀어붙이다가 갑작스럽게 번복하는 과정에서 정책 혼란과 불신만 남긴 꼴이 됐다.

더 큰 문제는 금융 조직 재편이 백지화되면서 금융 정책 기능을 넘겨받지 못하는 재경부다. 경제 정책 핵심 수단인 예산, 세제, 금융 중 예산은 예정대로 기획예산처로 빠져나가고 내년 1월 출범하는 재경부는 세제 기능만 남게 됐다. 과거 재무부 시절부터 정권의 필요에 따라 합치고 쪼개고를 반복해 왔지만, 이번처럼 경제 총괄 맏형 부처를 최약체로 만든 적은 없었다. 세제 기능만 갖고 범부처 간 정책을 조율하고 다른 부처를 움직이게 할 동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경제 컨트롤타워 공백·예산 낭비 우려

재경부 장관이 명목상 부총리 지위를 유지하지만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까지 부총리로 격상된 마당에 경제부총리의 권한과 위상도 반쪽으로 축소될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구윤철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이 추진하던 AI국 신설이 최근 관계 부처의 반대 등으로 올스톱됐다고 하는데, 벌써부터 경제 사령탑의 힘이 빠지고 있다는 평가마저 나온다. 미국발 관세 압박과 저성장 타개를 위해 어느 때보다 강력한 정책 조율이 필요한 상황에서 경제 컨트롤타워 기능이 무너질까 우려스럽다.

게다가 과거 사례에서 보듯 국무총리 산하로 가게 된 기획예산처는 대통령실과 정치권의 입김이 세질 공산이 크다. 미래 세대가 세금으로 갚아야 할 나랏빚이 해마다 110조 원씩 늘어나는 처지에서 예산처가 정권의 현금자동입출금기(ATM)로 전락하면 재정 건전성 악화가 불 보듯 뻔하다. 과거 이 대통령은 지역화폐·기본소득 등 트레이드마크 정책을 두고 사사건건 기재부와 충돌했다. 기재부를 겨냥해 “왕 노릇” “월권” “만행”이라는 질타도 서슴지 않았다. 이번 기재부 해체가 ‘분풀이용 손보기’가 아니라면, 경제 컨트롤타워에 힘을 실어주고 예산 낭비를 억제할 방안은 무엇인지 답을 내놓아야 할 때다.

#금융위원회#금융감독원#금융 조직 개편#정부조직법 개정안#경제 컨트롤타워
©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