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재 음식평론가추석만 되면 떠오르는 전래동화가 있다. 형편이 어려운 어느 집에서 차례를 지내려는데 작황이 좋지 않았고, 시기마저 빨라 벼가 덜 여물었다. 그래도 차례는 지내야지. 가장은 덜 여문 벼 낱알 가운데 그나마 익은 것을 겨우 모아 메 한 공기를 지었다. 하지만 풀기가 워낙 약해 차례상에 올리고 숟가락을 꽂자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아이고, 조상님. 간신히 메 한 공기 간신히 지어 올렸는데 마다하시는 겁니까? 저희도 못 먹는 것 올렸는데 이러시면 어떻게 합니까?” 지금의 풍족한 현실을 감안하면 그저 동화처럼 들리는 이야기다. 하지만 사실 보릿고개에서 벗어난 게 1970년대 초중반의 일이다. 불과 50년 전만 해도 우리는 못 먹고 살았다.
저런 빈곤의 시대가 또 찾아올 것이라고 보진 않는다(물론 장담은 못 한다). 그러나 조상에게 추수를 감사하는 고유 명절 추석에 원하는 만큼 먹고 누리지 못할 가능성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기후변화를 비롯해 전 지구적 위기 탓이다. 충북 영동군에서는 2010년대 후반부터 바나나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제주에서도 사라진 바나나를 내륙에서 키우고 있다니 반가우면서도 내심 두렵다.
이는 지구 온도가 올라갔다는 방증이니, 바나나 하나를 얻는 대신 열 가지를 이미 잃었거나 잃어가고 있을 수 있다. 바다에선 이미 조짐을 보인 지 오래됐다. 명절이면 빠질 수 없는 전, 그중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생선전의 재료인 명태는 ‘국산’이 사라진 지 오래다. 2008년 이후 어획량이 ‘0’이기 때문이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수온 상승과 해류 변화가 주원인이다.
그나마 전감은 이제 뉴질랜드 등에서 잡히는 홍메기로 상당 부분 대체됐다. 대체 어종을 찾은 바람직한 사례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밥만 먹고 살지는 않으니 세계로 눈을 돌려 보면 문제는 몇 갑절 더 심각하다. 우리의 국민 음료(?)인 아메리카노만 해도 그렇다. 브라질, 인도, 베트남 등 주요 산지의 작황이 부진해 커피 원두는 1년 새 가격이 두 배로 뛰었다.
저렴하고 접근하기 쉬운 기호식품으로 사랑받아온 초콜릿도 위기다. 원산지인 서아프리카가 이상기후와 카카오나무 병해를 겪으며 생산량이 급감했고, 2024년 이후 카카오 가격이 급등했다. 그래서 커피와 초콜릿 모두 지금처럼 누리는 게 불투명해졌다. 제과제빵에 필수적인 향신료 바닐라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주산지 마다가스카르가 잇단 자연재해로 작황 부진을 겪으며 가격이 폭등했다.
과일도 예외가 아니다. 특히 늦겨울과 초봄 사이 국산 과일의 공백을 메워 주던 고마운 오렌지는 더 이상 예전만큼 흔하다 말할 수 없다. 미국 플로리다를 중심으로 감귤녹화병이 확산돼 나무가 말라죽었고, 퇴치도 불가능하다고 한다. 미국의 오렌지는 물론이고 이탈리아의 레몬 등 다른 감귤류까지 영향을 받고 있다.
주식인 쌀은 괜찮을까. 이웃 나라 일본은 50년 넘게 정책적으로 감산해 온 대가를 요즘 치르고 있다. 한국의 식량 자급률은 쌀만 놓고 보면 100%지만, 밀은 1%에 불과하다. 모든 곡물을 합쳐도 2023년 기준 49% 수준이다. 이처럼 얼핏 풍족해 보이지만 사실 우리 식탁의 안녕은 차츰 위협받고 있다. 그래도 먹을거리가 일 년 중 가장 풍성한 지금, 현실을 한 번쯤 되새겨 보자고 이모저모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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