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거리를 걷다 보면 건물마다 병원이 없는 곳이 없다. 그런데 막상 아프면 갈 만한 병원을 찾지 못해 헤매기 일쑤다. 피부과 간판을 내걸었지만 정작 건선, 습진 같은 피부질환 환자는 받지 않는다. 아이가 뛰어놀다 상처가 나면 예전 같으면 동네 피부과나 외과에서 간단히 봉합했지만 요즘은 대학병원 응급실로 가야 한다. 인턴·레지던트 과정을 밟지 않은, 임상 경험이 전무한 일반의의 개원이 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진료 수가가 낮아 기피하는 탓도 있다. 병원에 갔다가 문전박대를 당한 환자들은 피부과 대신 피부관리과, 성형외과 대신 미용외과로 불러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한다.
▷아픈 환자를 받지 않는 병원이 갈수록 늘고 있다. 올해 상반기(1∼6월) 기준 운영 중인 의원 가운데 건강보험 청구 실적이 ‘0건’인 곳은 2304곳이었다. 2022년(1540곳)에 비해 50%나 늘어났다. 폐업이 아닌데도 건보 청구를 하지 않았다는 건 질병 진료나 치료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대부분 피부 시술이나 미용 성형에 집중하는 병원들이다.
▷피부과, 성형외과가 밀집한 서울 강남구의 경우 성형외과의 79%(358곳), 일반의원의 42%(311곳)에서 건강보험 청구 실적이 한 건도 없었다. 외국인 의료 관광객이 많은 중구(명동), 젊은 인구가 많이 찾는 마포구(홍대 앞)도 건보 급여를 청구하지 않는 의원 비율이 높았다. 필러나 리프팅 등 ‘쁘띠 성형’과 레이저 스킨부스터, 제모 등 미용 시술만 하는 의원들로 추정된다. ‘1만 원 보톡스’ ‘5만 원 필러’ 같은 미끼 상품을 내세운 공장형 의원도 많다.
▷피부 5cm 열상을 봉합하면 수가는 최대 3만 원 정도라고 한다. 필러 주사를 놓는 것보다 시간과 노력이 더 들지만 보상은 그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 이러니 미용, 성형 시장에 의사들이 몰려간다.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도수치료, 수액치료 같은 비급여 진료가 팽창하는 이유다. 이제는 건보 체계를 아예 이탈해 고가 의료 서비스만 제공하는 제3의 시장이 형성됐다. 지난해 의료 미용 시장은 3조 원을 넘어선 것으로 집계된다.
▷그렇지 않아도 의사가 부족한데 피부, 성형 시장으로 쏠림 현상이 심화하며 의사 배분도 왜곡됐다. 면허 제도를 통해 의사 공급을 제한하고 의료 행위를 독점할 권한을 부여하는 건 국민 건강이라는 공익에 종사하는 대가다. 그런데 아픈 사람을 외면하는 의사도 이런 특권을 누리며 수익을 보장받는 것이 맞나. 영국 미국 호주 등에선 추가적인 교육과 임상을 거친 간호사가 필러, 보톡스, 제모 등 미용 시술을 할 수 있다. 지난해 정부는 이와 비슷하게 미용 시장 개방을 추진했다가 의정 갈등 속에 포기하고 말았다. 병을 고치는 의사다운 의사에게 박탈감만 안겨주는 잘못된 보상 체계는 바로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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