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 전망은 저명한 경제학자조차 손사래를 칠 정도다. 변동성이 크고 요인이 복잡해 해석이 분분하다. 그럼에도 요즘 시장에선 ‘원화 가치의 구조적 하락세’를 언급하는 목소리가 심상치 않게 들린다. 수출이 줄고, 국내 투자가 위축되며, 인구절벽이 현실화하면 원화 수요는 감소할 수밖에 없기에 원화 값 하락은 구조적 추세가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 압박이 원화 약세를 부추기며 원-달러 환율을 끌어올린 데서 더 나아가 원화의 미래 자체를 비관하는 전망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원-달러 환율 1400원이 뉴노멀?
원-달러 환율이 오른다는 것은 달러에 비해 원화 선호도가 떨어졌다는 뜻이다. 반대로 외국인들이 한국 주식을 매수하고, 글로벌 기업들이 한국 반도체를 앞다퉈 사들이면 원화 몸값이 올라가 환율은 내려간다.
그런데 9월은 좀 이상했다. 외국인 순매수로 코스피가 8번 신기록을 경신했고, 인공지능(AI)발 반도체 ‘슈퍼사이클’로 수출도 나쁘지 않았는데 원-달러 환율은 1400원대까지 올랐다. 트럼프 대통령이 “3500억 달러 대미 투자를 선불로 내라”고 한 직후엔 1410원대로 치솟았다.
달러를 벌어들여도 다시 해외로 갈 것이란 불안감이 반영된 것이다. 게다가 원화는 다른 주요 통화보다도 더 저평가되고 있다. 9월 달러인덱스는 0.4% 오르는 데 그쳤지만, 원화는 달러 대비 1.6%나 절하됐다.
기간을 더 두고 보면 원화의 하향 추세가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1일 기준 원-달러 환율은 5년 전보다 20.3% 상승했다. 미국 싱크탱크 한미경제연구소(KEI)는 5월 ‘원화의 걱정스러운 트렌드’라는 보고서에서 “코로나 직후 잠깐의 반짝 회복을 제외하면 원화는 지난 10년간 장기 하락세”라고 진단했다. 2015년 초만 해도 원-달러 환율은 1100원을 넘느냐 마느냐였다. 한국 경제에 대한 비관론 우려
수출 강국 한국의 원화 가치는 왜 10년 동안 하락했을까. KEI는 들어온 달러가 한국에 머무르지 못하고 곧바로 해외로 투자되기 때문이라고 짚었다.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 올 2월 현대경제연구원이 ‘균형환율’(경제 상황을 감안한 적절한 통화 가치)을 추정해 봤더니 2022년 말 1179원에서 2024년 말 1351원으로 상승했다. 실제 환율은 이보다 더 높았다. 구조적 저성장과 미국보다 낮아진 경제성장률에 대한 시장의 우려가 반영된 것이라는 게 보고서의 결론이었다.
올해 성장률 0%대, 잠재성장률 1%대 암울한 전망이 원화의 미래 전망에 반영되고 있는 셈이다. 원화를 쓸 인구가 줄어드는 저출산 고령화도 원화 가치 하락 전망에 힘을 더한다. 물론 경제는 반등할 수 있고, 예측이 어려운 환율 역시 어디로 튈지 아무도 모른다. 코스피가 3,500 선을 뚫었듯, 원화도 힘을 받을 기회가 얼마든지 있다.
문제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원화 비관론이 확산된다는 점이다. 트럼프발 관세 압박에 수출이 줄고, 국내 투자는 쪼그라들 것이며, 저성장이 지속될 것이란 미래에 대한 비관론이 원화 하락에 베팅하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다.
실제로 9월 코스피의 고공행진에도 국내 개미들은 9월 한 달 동안 약 10조 원을 순매도했다. 금이 통화가치 하락을 헤지할 최고의 안전자산이라며 국내 금시장에 유독 수요가 몰려 최근 10%가량 프리미엄도 붙은 상태다.
그런 점에서 원화 가치와 출산율은 닮았다. 미래에 대한 기대가 무너진 청년 세대가 아이를 낳지 않는 것처럼 원화 비관론에도 한국 경제에 대한 구조적 불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저성장이 가져온 비관론이 경제의 모든 지표와 개인의 일상, 가치 전반에 스며들고 있다는 방증이다. 저성장에서 벗어나기 위한 구조개혁이 모든 경제정책에 있어 우선돼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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