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국가과학자’ 20년 전 실패한 ‘국가석학’ 2탄 안 돼야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11월 9일 23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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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과학기술 분야 인재 유출을 막기 위해 ‘국가과학자’ 제도를 신설하기로 했다. 세계적 연구 업적을 가진 국내 연구자를 내년 말부터 5년간 20명씩 총 100명을 선발해 10년 동안 매년 1억 원씩 연구비를 지원하는 게 핵심이다. 이들이 공항을 이용할 때 편의를 봐주는 등 VIP 대접을 하고 국가 과학기술 정책 설계에도 참여할 수 있게 한다. 이공계 학생들과 과학자들에게 성장 경로와 비전을 제시할 롤모델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국가과학자 제도는 중국 정부가 자국 석학들에게 부여하는 예우인 ‘원사(院士)’ 제도를 벤치마킹한 것이다. 원사로 선발되면 평생 차관급에 준하는 예우를 받으며 정년 제한 없이 연구에 몰두할 수 있다. 국가 주요 정책 자문, 후학 양성 등에서도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국보급 인재’로 대우받는다.

하지만 형식만 빌려온다고 해서 정책이 성공할 순 없다. 이미 20년 전에 실패한 전례가 있다. 정부는 2005년 노벨상 받을 과학자를 지원하겠다며 ‘국가석학’ 제도를 도입했다. 4년간 매년 10명 안팎씩 총 38명을 선정해 연 1억∼2억 원의 연구비를 지원했지만 2008년 교육·과학기술 부처 통합 과정에서 슬그머니 사라졌다. 국보급이라고 치켜세우더니 퇴직할 때가 되자 ‘뒷방 늙은이’ 취급을 했다. 탄소나노튜브(CNT) 권위자 이영희 전 성균관대 석좌교수, 이론물리학자 이기명 전 고등과학원 부원장 등 국가석학들은 현재 한국이 아닌 중국으로 건너가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과학기술 인재에 대한 열악한 처우와 연구개발(R&D) 예산 삭감 등 불안정한 연구 환경 탓에 그나마 남은 인재들마저 해외로 떠나고 있다. 최근 한국은행이 국내 석박사급 이공계 인력 2700여 명을 설문 조사해 보니 43%가 3년 내 해외 이직을 고려하고 있었다. 특히 인공지능(AI) 분야에서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중 네 번째로 인재 순유출이 많은 국가다.

과학기술 인재들을 지키려면 연봉 등 처우의 개선과 함께 자긍심을 갖고 제대로 연구할 수 있는 인프라 구축이 뒤따라야 한다. 우수 연구자가 정년 제한 없이 계속 연구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혁신적 실패가 인정받도록 평가체계도 바꿔야 한다. 애국심에만 호소해서는 떠나는 인재를 붙잡을 수 없다.


#국가과학자#인재유출#연구비지원#과학기술정책#원사제도#국가석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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