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 씨는 월남자 가족이어서 대학에 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컸다. 설사 성분이 나쁘지 않더라도 그가 살던 산골에서 대학을 간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웠다. 허 씨의 진로는 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 가는 것으로 정해져 있었다.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없이 학창 시절을 보냈다.
1993년 17세에 중학교를 졸업한 허 씨는 당연한 듯 군에 입대했다. 그가 간 부대는 평북 구성에 있는 군수동원총국 산하 경비부대였다. 구성은 고려거란전쟁 때 귀주대첩이 벌어진 지역이다. 이곳에서 그는 2002년 제대될 때까지 만 10년을 복무했다.
공교롭게도 그가 복무한 기간은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던 ‘고난의 행군’ 시절이었다. 특히 험준한 산들로 둘러싸여 농사지을 땅이 거의 없는 구성은 북한에서도 가장 먼저 사람들이 굶어죽은 곳이다. 산이 많다 보니 이곳은 오래전부터 북한의 핵심 군수공업 기지로 활용됐다. 깊은 산골짜기들을 따라 전차공장, 탄약공장, 피복공장 같은 군수공장들이 갱도 속에 숨겨져 있었다.
1994년 김일성 사망을 전후해 배급이 갑자기 중단되자 군수공장 노동자들은 발버둥칠 겨를도 없이 죽어 갔다. 일반 공장은 배급받지 못하면 출근하지 않고 장사를 다니거나 산에 올라가 화전을 개간해 농사라도 할 수 있었지만, 군율이 적용되던 군수공장은 이마저도 할 수 없었다. 북한이 늘 강조하는 ‘자력갱생’할 기회조차 받지 못한 것이다.
노동자들 가족이 산에 올라 풀뿌리를 캐고 소나무 껍질도 벗겨 먹었지만, 반년쯤 지나니 껍질 벗길 나무조차 남지 않았다. 나무가 사라지는 숫자만큼 산에 무덤이 늘어났다.
허 씨는 이 참혹한 현실을 수십만 톤의 식량을 깔고 앉아서 목격했다. 그가 속한 경비대대는 구성 산골짜기에 숨겨진 식량창고를 지키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구성엔 군수동원총국이 관리하는 매우 큰 전쟁 예비 물자 저장 갱도가 많았다. 예비 물자엔 식량과 연료, 무기 부품이 들어 있었다. 탈곡하지 않은 벼를 가마니에 담아 수많은 갱도에 나눠 보관했다.
오래 보관하면 벼가 썩기 때문에 몇 년에 한 번씩 갱도의 벼를 실어 내가고, 새로 수확한 벼를 채웠다. 그때마다 화차 20개를 연결한 열차가 가마니를 잔뜩 싣고 오간다. 쉬지 않고 진행해도 교환 작업은 3~4개월씩 걸렸다.
구성 갱도들에 쌀이 얼마나 저장됐는지 알 순 없었지만, 수없이 드나드는 차량들을 보면 수십만 톤은 넘을 것 같았다. 그렇게 산마다 거대한 쌀 창고들이 있는데도, 구성 사람들은 단 한 톨의 쌀알도 받지 못하고 무리죽음을 당했다.
전쟁에 쓸 연료는 바위산 하나를 통으로 파내 만든 저장탱크에 보관했는데, 이곳이 터지면 구성 시내가 날아간다고 했다.
지난해 인천 강화군 교동도 통일전망대를 찾은 허요셉 씨가 멀리 보이는 북한 땅을 가리키고 있다.
● 제대 1년 뒤 탈북
굶주림은 민간인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쌀 창고를 지키는 군인 속에서도 허약자들이 속출했다. 갱도 안에 쌀이 많아도 이걸 건드리면 역적이 되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전쟁 예비 물자 저장 갱도 주변은 민간인 접근 금지구역이라 산을 개간해 농사를 지어도 도둑맞을 걱정이 덜했다는 것이다. 또 식량 교환이 이뤄질 땐 화차 경비를 서기 위해 나가기도 하는데, 이때 가마니에서 새어 나온 쌀로 밥을 해 먹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굶어 죽지 않을 정도였다는 의미일 뿐, 배불렀던 것은 아니었다. 병사들도 옥수수가 익을 때쯤부터 밭에 몰래 들어가 옥수수를 생으로 씹어 먹었다. 겨울엔 먹을 것이 소금에 절인 무밖에 없었는데, 이걸로 몇 개월 내내 반찬과 국을 만들어 먹다 보면 염독이 올랐다.
배가 고프니 군기도 바닥에 떨어졌다. 경비대대 안에서 사건, 사고가 계속 터져 나왔다. 1994년엔 민가에 내려가 가축을 훔쳐 잡먹은 동료 3명이 총살되기도 했다. 구타는 비일비재했다. 1995년엔 먹는 것 때문에 구박을 받던 병사가 상관 2명을 사살하기도 했고, 보초 나갔다가 동료를 사살한 사건도 벌어졌다.
굶주림 속에서도 시간은 흘러 2002년이 왔다. 10년이나 청춘을 바쳤지만, 문제의 부대 출신에 월남자 후손이기도 한 그는 노동당에 입당하지 못했다. 제대 후 그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곳에선 농사밖에 할 일이 없었다.
얼마쯤 지나서 보니 다른 길도 보였다. 젊은이 중엔 농장에 출근하지 않고 밀수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두만강을 낀 유리한 지형을 활용해 사는 것이었다.
허 씨도 밀수를 시작했다. 매월 중국 돈 20위안을 내면 농장 일을 하지 않아도 눈감아 주었다. 그 돈으로 비료도 사 오고, 굶주린 노약자들도 먹고 살았다.
밀수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네 살 어린 여동생이 중국으로 탈북했다. 허 씨는 2003년 6월 동생을 찾으려고 중국으로 넘어갔다. 이전에도 중국 땅을 여러 번 오갔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탈북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넓은 중국 땅에서 동생을 쉽게 찾을 순 없었다. 우선 자리부터 잡아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용정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5개월쯤 일했을 때 한국에 가서 먼저 자리를 잡은 탈북민을 알게 됐다. 그는 허 씨에게 북한의 각각 다른 지역에 있는 자신의 가족을 국경까지 데려오거나, 가족사진을 가져다 주면 그 대가로 한국에 갈 수 있는 선을 연결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중국에서 일하면서 허 씨는 북한에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지를 알게 됐고, 한국으로 가면 잘 살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한국에 갈 수 있다는 말에 허 씨는 주저 없이 다시 북한으로 넘어왔다.
하지만 기차도 제대로 다니지 않는 북한에서 여러 가족을 국경까지 데려온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일은 점점 꼬여갔다. 가족 한 사람은 데려왔지만, 다른 가족은 약속된 시간에 도착하지 못했다.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지만 가족사진은 확보했던 터라 그는 다시 두만강을 넘었다. 12월 강추위에 강으로 접근하다 국경경비대에 발각됐다. 얼음물에 뛰어들어 필사적으로 추격을 따돌렸다.
사진을 전달해 주자, 심부름을 시킨 한국의 탈북민은 산동성에 있는 한 조선족 교회를 찾아가라고 했다. 그 교회에서 성경 공부를 해서 믿음이 생기면, 베이징 주재 한국영사관으로 들여보내 준다는 것이었다. 알려준 교회를 찾아간 그는 두 달 동안 열심히 성경 공부를 했다. 그동안 그와 비슷한 처지의 탈북민들이 교회로 몰려왔다.
2004년 2월 11일, 허 씨는 베이징 주재 한국영사관 앞에 나타났다. 그와 함께 영사관 진입을 시도할 탈북민은 모두 18명이었다.
계획은 여권을 분실한 한국인인 것처럼 위장해 영사관 정문 접수실로 접근한 뒤 경비 서는 공안들을 한꺼번에 밀쳐 내고 진입하는 것이었다. 18명이 영사관 정문 앞에서 서성이면 주목을 받기 때문에 몇 명이 먼저 진입조가 돼 뛰어들기로 했다.
28세 건장한 청년에 10년 군 경력을 가진 허 씨가 앞장섰다. 영사관 정문에 가서 여권 업무 때문에 왔다고 하니, 경비원은 “오늘은 쉬는 날이라 업무를 보지 않는다”고 했다.
예상에 없던 일이었다. 문을 따고 들어갈까, 아니면 다른 날에 올까 머리를 굴리는 사이, 경비원이 눈치를 채고 신호를 보냈다. 영사관 주변엔 잠복한 공안들이 많았다. 공안들이 달려오자 멀찍이 떨어져 눈치를 보던 다른 탈북민들이 우르르 흩어졌다.
허 씨도 지체하지 않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맨앞에 섰던 그는 공안의 집중 표적이 됐다. 한참을 뛰다 보니 길이 막혔다. 따라오는 공안 두세 명을 때려눕혔지만, 이내 10여 명이 몰려와 덮쳤다. 전기곤봉이 몸에 닿는 순간 그는 정신을 잃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18명 중에 허 씨와 여성 2명이 잡혔고 나머지는 다 도망갔다. 그는 베이징 국제구류소에 수감됐다가 무장경찰에 호송돼 단둥으로 옮겨졌다. 2주 뒤에는 북한 보위부가 중국으로 와서, 수감돼 있던 15명가량의 탈북민을 넘겨받아 신의주로 끌고 갔다.
수갑과 쇠고랑을 차고 신의주에 가서 들은 첫말은 “반역자 새끼들, 대가리 까라”는 호통이었다. 허 씨처럼 한국영사관 진입을 시도했던 탈북민은 한국행 기도자로 엄중히 처벌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중국에서 이들의 체포 경위를 넘겨주지 않았는지, 신의주 보위부에선 그를 중죄인으로 분류하지 않고, 회령에서 온 보위부 호송원에게 넘겨주었다.
일주일 동안 기차를 타고 회령 보위부로 이송됐다. 호송원이 수갑 하나를 자기 손과 허 씨 손에 함께 채워 도망갈 수도 없었다. 신의주 보위부 감옥에선 그래도 밥을 몇 숟가락 주었지만, 회령은 쓰레기죽을 한 국자 반만 주었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살이 쭉쭉 빠졌다.
한번은 보위부가 그를 끌고 그의 고향에 가서 농민을 모아 놓고 비판 모임을 열기도 했다. 그의 죄명은 터무니없게도 “남조선으로 가려다 연길 비행장에서 체포됐다”는 것이었다.
‘회령 보위부는 내가 베이징 영사관에 들어가다 잡힌 것을 모르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희망이 보였다. 그는 베이징에서 일자리를 구하다가 체포됐다고 끝까지 주장했다. 하도 완강하게 주장하니 보위부도 단순 탈북자로 간주했는지 그를 노동단련대로 보냈다.
그런데 반년 동안의 감옥 생활에 그의 몸무게는 42kg밖에 되지 않았다. 조금만 더 있으면 죽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지 보위부는 병보석을 허가했다. 그때가 2024년 6월 말이었다.
두 달 동안 집에서 열심히 치료받았다. 하지만 살이 붙으면 다시 단련대로 끌려가야 하는 운명이었다. 주저앉아 오라를 받을 순 없었다. 어느 정도 회복된 8월 25일 밤 그는 다시 중국으로 탈출했다.
간호사가 된 후에도 공부를 더 하고 싶어 서점에서 대학수학능력시험 참고서를 구입하고 있는 허요셉 씨.
● 한국 입국과 캐나다행
중국에 다시 넘어왔지만, 지난번 도강과 이번 도강은 성격이 달랐다. 이번에 다시 잡히면 훨씬 더 중한 처벌을 받을 것이 뻔했다.
그는 국경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자리를 구해 일하면서 한편으론 산동성 조선족 교회에 다시 연락했다. 영사관 진입 실패로 미안한 마음이 있었던 교회에서 그에게 다시 다른 선을 알려 주었다. 덕분에 중국에 넘어간 지 3개월 뒤 다시 한국행 길에 올랐다.
이번엔 흑룡강성 목단강까지 갔다가 다른 탈북민들과 함께 곤명을 거쳐 미얀마로 넘어가는 루트였다. 이번엔 사고가 없었다.
2004년 12월 그는 미얀마 땅을 무사히 밟을 수 있었다. 이곳에서 다른 탈북민 12명과 함께 3개월 동안 감옥생활을 한 끝에 미얀마 한국대사관에 인계됐고, 다시 태국으로 보내졌다.
미얀마에서 수감 생활을 할 땐 회령 보위부에서 만났던 30대 부부가 계속 생각났다. 이 부부는 미얀마까지 갔다가 북송된 사람들이었다.
미얀마에선 한국대사관 연락처를 아느냐, 모르느냐가 운명을 갈랐다. 한국대사관 연락처를 모르고 무작정 넘어온 탈북민은 중국으로 되돌려 보냈는데, 중국 공안에 인계되는 순간 북송을 피할 길이 없는 것이다. 그 부부는 한국행 기도자란 딱지가 붙었기 때문에 다시 살아나올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
태국에서 얼마쯤 있다가 남들처럼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왔고, 조사와 하나원 생활을 마쳤다. 한국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날은 2005년 8월 18일. 서울 강서구 가양동 임대 아파트에 입주했다.
다른 탈북민들처럼 좌충우돌 정착 과정이 시작됐다. 영등포의 한 기계 제작 업체에 처음 취직했다. 그곳을 6개월 다니다가 다시 간판 만드는 회사로 옮겨 갔다. 박봉은 참을 수 있었지만, 탈북자라고 외국인 노동자 취급을 당하는 것은 참기 어려웠다.
힘들 때마다 그는 자신에게 삶의 동아줄을 내밀어 주었던 교회에 나가 위안을 얻었다. 2006년엔 북한에서 쓰던 이름 대신 허요셉으로 개명도 했다. 그렇지만 교회가 그의 삶을 책임져줄 순 없는 일이었다.
계속 현실을 피해 도망치고 싶었던 2007년경 탈북민 사회에서 캐나다로 이주하는 바람이 불었다. 당시 캐나다는 북에서 왔다고 하면 한국에 거주하던 탈북민도 난민으로 인정해 주었다.
많은 탈북민이 캐나다로 떠났는데, 허 씨도 멋모르고 따라나섰다. 홀몸이라 비행기표를 구해 훌훌 털고 떠나는 데 어려움도 없었다.
캐나다 생활은 마음에 들었다. 가자마자 임시 영주권을 받았다. 낮에는 영어 공부를 하게 했고, 오후에는 꽃집에서 일했다. 무엇보다 탈북자라고 무시하는 사람이 없어 좋았다.
6개월쯤 지나니 함께 캐나다에 온 사람들이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한국에 다시 가겠다고 했다. 아는 사람 하나 없고 말도 통하지 않는 캐나다에서, 그나마 의지했던 일행이 돌아간다고 하니 겁이 났다. 허 씨는 운 좋게 외국 바람 쏘인 것에 만족하고 함께 서울로 돌아가기로 했다.
서울로 돌아온 허 씨는 2008년 적십자간호대학에 입학했다. 3년제 전문대였는데 졸업하면 간호사가 될 수 있었다. 허 씨가 간호사가 되기로 결심한 것엔 캐나다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토론토에 살 때 생선가시가 목에 걸려 병원에 간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생전 처음으로 남자 간호사를 보았다. 남자가 간호사를 한다는 것을 그때까진 상상도 못 했다.
한국에 돌아와서 어디에 취직할지 고민하다가 직업 상담사에게 “혹시 한국도 남자 간호사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당연히 될 수 있고, 또 뜨는 직업이다”는 대답을 들었다. 간호사가 되면 전문성을 갖고 평생 직장을 얻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공부가 쉽진 않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기초가 달려 따라가기 어려웠다. 1년 반 뒤 대학을 그만두었다. 이때가 그에게 가장 힘든 시기였다. 막노동도 해 보고 공부도 해 봤지만 어느 것 하나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아, 나는 이 사회에선 적응이 안 되는 쓸모없는 존재란 말인가.’
9층 아파트 베란다 창문을 열고 뛰어내릴까 고민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주변에 그에게 용기를 주는 사람들이 있어 차마 그러지 못했다. 그는 마음을 다시 다잡았다.
‘한 번 더 도전해 보자. 이번엔 목숨을 걸고 해 보자.’
2010년 백석대 간호학과에 다시 입학해 4년제 과정을 밟았다. 처음에 안 됐던 공부가 이번이라고 잘 될 리는 없었지만, 버티고 또 버텨 2015년에 마침내 졸업장을 받았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여덟 과목을 치는 간호사 국가고시에서 떨어졌다. 대학 동기 63명 중 3명이 떨어졌는데, 그중 한 명이 됐다.
자신과의 싸움이 다시 시작됐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원에 다니는 일과가 이어졌다. 건설, 식당, 이사 등 안 해 본 아르바이트가 없었다.
하지만 국가고시 합격이라는 목표는 손에 잡힐 듯 말 듯, 계속 피해 도망갔다. 2016년 과락…. 2017년 평락…. 2018년 또 평락….
시험장에 들어갈 땐 또 왔냐는 시선이 부끄러워 정문을 피해 담장을 넘어 들어가기도 했다. 해가 흘러가면서 공부했던 문제집이 허리까지 쌓이는데 왜 떨어졌는지 이유도 모르겠다는 것이 더 고민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공부 방법을 몰라서 헤맸던 것 같습니다. 요령을 모르고 자기 생각만 앞세우며 고집을 부린 것이었죠. 포기할까 수없이 고민했지만, 이 나이에 포기하면 다른 일이라고 쉬울까 싶어 오기로 다시 일어섰습니다.”
다섯 번째 시험을 앞두고 교수를 찾아갔다. 교수는 그에게 조언을 해 주었다.
“자신 있는 과목부터 풀어라. 시험 전날은 쉬어라. 시험장에 들어갈 땐 늘 먹던 음식을 먹어라. 그래도 모르겠으면 3번을 찍어라.”
그 조언이 효과가 있었는지 몰라도, 2019년 2월에 친 다섯 번째 시험에선 합격했다. 합격자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올라간 것을 본 그 심정은 어찌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조언해 준 교수조차 “인간 승리”라고 울먹울먹할 정도였다.
간호사가 되기까지 무려 11년이나 걸렸다. 이미 그의 나이는 43세였다. 자격증을 받고 쉴 겨를도 없었다. 간호사 합격 통지를 받았을 때, 집에는 쌀 한 줌과 달걀 두 알만 있었다. 집세도 못 내 벼랑 끝까지 몰렸던 상황에서 기적적으로 평생 직장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시험 합격 후 여기저기 직장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다행히 남성 간호사는 없어서 못 쓰는 게 현실이라 구직이 어렵진 않았다. 2019년 3월 그는 서울의 한 유명 병원 응급실 간호사로 취직했다.
그렇지만 그에겐 쉬운 일이 없었다. 병원과 일에 적응한다는 것은 새로운 난제였다. 환자들은 초보 간호사를 귀신같이 알아보고 항의했다. 주사는 잘 놓았는데, 상황 판단 능력은 경험과 비례했다. 20대 여성 간호사에게 “이런 것도 못 하냐. 학교에서 뭘 배웠냐”고 신랄하게 추궁당해 쩔쩔매는 43세 아저씨 간호사의 모습은 누구나 상상하는 그대로였다.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릴 때가 시험공부할 때보다 더 많았다. 첫 직장은 결국 6개월 버티다 그만두었다. 자존감은 바닥을 쳤다.
‘서울은 너무 빡세구나. 지방에서 배우고 오자’는 생각에 청주의 한 병원 응급실에 취직해 일했는데, 거기서 많이 배웠다. 이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간호사 수요가 많아지자 다시 서울로 올라와 직장 생활을 이어갔다.
응급실은 물론이고 코로나19 전담 간호사도 해 보고, 급성기 병동에서도 일했다. 점차 경력도, 실력도 쌓여 갔다.
2023년부터 영등포의 한 요양병원 중환자실에 취직해 일하고 있다. 요양병동에선 70세까지 일할 수 있다. 멀리 바라보며 살 수 있어 좋다. 6년 차 간호사가 된 그를 이제 아무도 무시하지 못한다. 후배 간호사들에게 일을 가르쳐 주는 경험 많은 간호사가 됐다.
점점 일도 재미있어지고, 자신의 장점도 알게 됐다. 여기저기서 일을 해 보니 자신에겐 체력과 순간 판단이 중요한 응급실보단, 인성과 진심이 중요한 노인 환자를 상대하는 일이 맞았다.
그는 돌보던 환자가 퇴원할 때 가장 기분이 좋다. 퇴원한 환자들이 보낸 편지를 받을 때 너무 행복하다. 드디어 이 사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기쁨으로 삶이 즐거워진다. 한국은 노력한 것만큼 돌아오는 사회라는 말의 참뜻을 이제 깨달았다.
한국에 와서 정착하지 못하고 좌절하는 다른 탈북민을 보면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저는 남들 척척 붙는 간호사 시험도 다섯 번 만에야 통과한 사람입니다. 포기도 하고 싶었고, 죽고도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살면서 깨달은 것은 무엇인가 얻으려면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생기지 않지만, 노력하며 흘린 땀방울의 대가는 꼭 돌아옵니다. 다른 탈북민들도 다섯 번이나 재수해 43세에 간호사가 된 저를 보면서 쉽게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허요셉 씨는 끝끝내 정상에 오른 자의 희열을 깨달은 사람이다. 또 다른 삶의 고개를 맞닥뜨릴지라도 이제 그는 포기하지 않고 올라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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