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이재명 대통령과의 만남에서 ‘북한에서의 골프’ 이야기를 나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구상에서 골프를 가장 좋아하는 국가수반으로 알려졌다. 2022년 9월 트럼프 대통령이 골프장에서 드라이브를 휘두르는 모습. 동아일보 DB
“김정은도 만나시고, 북한에 ‘트럼프 월드’도 지으셔서, 제가 그곳에서 골프도 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좋아요. 우린 할 수 있어요.”
미국 워싱턴에서 25일(현지시간) 열린 첫 한미 정상회담에선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사이에 이런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일까요. 북한의 해외판 신문이라고 할 수 있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 조선신보가 26일 두 사람이 보란 듯이 북한 골프 관광을 홍보하고 나섰습니다.
조선신보는 “최근 평양에서의 골프 관광이 국내외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며 “조선에서도 관광업이 발전하면서 다양한 관광 유형들이 등장하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신문은 이어 평양골프장과 서산골프연습장을 거론하며 “아름다운 자연 경치와 온화한 기후조건으로 하여 골프 관광에 유리한 자연 지리적 조건을 갖췄다”고 자평했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골프 관광을 홍보하고 있긴 하지만, 문제는 북한에 경기를 할 수 있는 18홀 골프장은 딱 한 개밖에 없습니다. 골프장이 하나밖에 없는 나라가 골프 관광을 홍보하다니, 참 기이한 일이죠. 그런데 북한 골프 이야기를 해보면 기이한 일이 훨씬 많습니다.
지난해 5월 평양골프장에서 열린 봄철골프애호가경기에서 한 북한 선수가 엉성한 폼으로 드라이브 샷을 치고 있다. 출처 내나라
● 반동 부르주아 운동
북한에서 야구와 골프는 오랫동안 혁명하는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반동 부르주아 운동’으로 간주돼 왔습니다.
야구의 경우 경기는 보통 주말 오후나 저녁에 시작돼 4시간 정도 열립니다. 축구처럼 프로팀들이 있고, 주말에 주로 경기가 열립니다.
그런데 북한 당국이 매일 4시간씩이나 주민들이 야구에 정신이 팔리도록 놔둘 리가 없죠. 그 시간이면 일을 시키던가, 하다못해 강연회라도 해서 사상 선전을 해야죠. 그나마 축구는 90분짜리 경기라 야구보다 훨씬 짧습니다.
또 축구는 공 하나와 공터가 있으면 다 할 수 있지만, 야구는 그렇지 못합니다. 야구 방망이, 야구공, 글로브 등 장비도 많이 필요합니다. 가난한 북한이 인민이 좋으라고 그런 것을 공급할 리가 없습니다.
골프는 야구보다 훨씬 더 부르주아 운동입니다. 골프는 넓은 잔디밭에서 해야 하는데, 그런 잔디밭이 무려 18개나 있어야 합니다. 사람 먹을 강냉이 재배할 땅도 없는데, 한 개 작업반이 일할 수 있는 30헥타르 규모의 방대한 땅을 잔디에 양보할 순 없겠죠.
전기나 물도 없는데 양수기를 돌려 잔디를 키워야 하고, 농장 김매기에 동원될 사람들을 뽑아 잔디를 깎아주어야 합니다.
경기 시간도 야구보다 더 많이 잡아먹습니다. 결정적으로 골프를 하려면 수천 달러의 장비를 각자 갖추어야 하는데, 노동당이 인민을 위해 골프 장비를 사줄 리도 만무합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때 북한에서 골프 선수들이 출전한 겁니다. 선수 4명 모두 40대 후반의 아저씨들이었죠. 나중에 알고 보니 이들은 모두 일본에 사는 조총련 소속 남성들이었습니다. 물론 국제대회에서의 성적은 한심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대다수 북한 주민이 골프장이나 골프 치는 모습을 처음 본 시기는 1992년이었습니다. 이때 김정일의 지시로 ‘민족과 운명’이란 다부작 예술영화가 제작됐는데, 영화 속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측근들과 골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에야 북한 주민들은 “아하, 골프라는 것이 저런 잔디밭에서 저런 채를 휘두르면서 치는 것이구나”하고 처음 알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어서 드는 궁금증이 있었습니다. “저 장면은 도대체 어디에서 찍었지? 우리나라에 골프장이 있단 말인가?”
북한의 유일한 18홀 골프장인 평양골프장의 전경. 출처 내나라
● 김 씨 일가의 골프 수준
알고 보니 인민들 모르게 있긴 있었습니다. 1987년에 평양에서 약 30km 떨어진 남포 강서구역 태성호 주변에 골프장이 건설됐던 것입니다.
이것도 북한 당국의 의지로 건설한 것이 아닙니다. 가끔 북한에 큰돈을 들고 찾아오는 조총련 기업인들이 “평양에 와보니 놀게 너무 없다. 돈은 우리가 대줄 테니 골프장 하나 지읍시다”라고 한 것입니다.
돈 대준다고 하니 김정일은 태성호 주변 땅을 내주어 총면적 12만㎡, 전장 7㎢, 18홀 규모의 골프장이 건설됐습니다.
물론 인민들은 얼씬할 수도 없었죠. 평양을 방문한 조총련계 인물들과, 장성택, 김경희 등 북한의 ‘로열패밀리’ 일원만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김정일은 골프를 했을까요? 북한이 “김정일이 평양골프장에서 생애 첫 라운딩을 해 11개의 홀인원을 포함해 38언더파를 기록했다”고 선전하고 있다는 말이 지금도 돌지만, 이는 호주의 이름 없는 매체가 옛날에 지어낸 말입니다.
그렇지만, 김정일도 골프에 관심은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김정일의 여러 별장을 가봤던 탈북민은 “골프 연습장 수준의 잔디밭이 있는 별장들이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하지만 김정일은 골프에 별로 소질이 있었던 것 같진 않습니다. 체형 자체가 골프에 적합하지도 않았고, 또 골프를 치려면 팀을 이뤄야 하는데 ‘최고 존엄’이 아래 것들과 ‘굿샷~’ 이러며 돌아다니기도 내키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김정은은 골프를 치는지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체형을 떠올리면, 절대 골프를 칠 몸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난티가 금강산에 건설했던 골프장의 모습. 사진은 유명한 14번 ‘깔때기 홀’이다. 동아일보 DB
● 비운의 금강산 골프장
평양골프장이 외부에 본격적으로 문을 연 시점은 2005년입니다. 그해 8월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가 평양에서 총상금 1억 원을 걸고 평양오픈골프대회를 열었습니다. 당시 19세 송보배 선수가 우승했습니다.
이때는 남북 관계가 매우 좋았던 시기입니다. 원하는 사람은 여행사를 통해 평양 관광을 다녀오기도 했는데, 이재명 대통령도 돈을 내고 평양 관광을 다녀왔죠.
금강산 관광도 활성화됐고, 개성공단도 가동을 시작했습니다. 2004년 12월 한국 기업 아난티가 850억 원을 투자해 금강산에 골프장을 건설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 금강산 골프장은 참 비운의 골프장입니다. 2008년 완공돼 일반에 오픈도 하기 전에 한국인 박왕자 씨가 피살되면서 금강산 관광이 전면 중단됐습니다.
아난티는 금강산 골프장 회원권을 2500만 원에 팔았는데, 4000명 이상이 구매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금강산을 가보지도 못했습니다. 이후 이들은 회원권 가격 반환 소송을 했지만 패소했습니다. 아난티의 잘못이 아닌 천재지변에 해당됐기 때문이죠. 아난티는 골프장 건설로 큰 수익을 얻었습니다.
이후, 이 골프장은 방치돼 있다가 2019년 2월 베트남 하노이 미북 정상회담 결렬에 분노한 김정은의 화풀이 대상이 됐습니다. 그해 10월 이곳을 찾은 김정은은 “너절한 남측 시설을 싹 들어내라”고 지시했습니다.
올해 위성사진엔 금강산에 있던 ‘아난티 골프 리조트 앤 스파’의 메인 클럽하우스와 스파 건물이 완전히 철거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지난해 8월 평양에 거주하는 러시아 여성이 평양골프장에서 찍어 소셜미디어에 올린 사진. 한국 골프용품업체 랭스필드의 골프백이 사진과 영상에 담겼다. SNS 캡처
● 돈맛을 알게 한 골프대회
금강산골프장과는 달리 평양골프장은 지금까지 잘 활용되고 있습니다. 북한이 골프장 운영을 통해 돈맛을 알게 된 것입니다.
2011년 4월 영국에 있는 루핀이라는 여행사가 평양에서 ‘국제 아마추어 골프대회’를 개최하겠다고 제안하자 북한은 흔쾌히 승인했습니다.
명색이 대회이지만, 상금은 없고 오히려 돈을 내고 가야 했습니다. 1회 대회에선 영국, 프랑스, 독일, 호주,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8개국의 아마추어 선수 17명이 참가했는데, 84타를 기록한 25세 핀란드 청년 올리 레토넨 씨가 우승했습니다.
대회에 참가한 선수들은 1인당 999유로를 냈습니다. 물론 평양에서 마술쇼를 보고 묘향산과 비무장지대 등을 방문하는 관광 일정까지 포함된 비용입니다.
루핀여행사가 주관한 대회는 2016년까지였습니다. 북한이 “왜 영국 여행사가 돈을 벌게 하지? 우리가 벌면 되지”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북한은 2017년 려명골프여행사를 만들어 직접 영업을 시작했습니다. 매년 봄과 가을 두 차례 대회를 열었고, 이름도 ‘골프애호가경기’로 지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 사태로 외국 관광객 참가가 중단됐습니다. 2023년부터 다시 받는다곤 했지만, 실제로 가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가장 최근인 2025년 ‘봄철골프애호가경기’는 5월 6일부터 8일까지 열렸고, 30여 명의 골프 애호가들이 참가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역시 외국인은 없고, 나이든 북한 아저씨들이 엉성한 폼으로 골프채를 휘두르는 모습이 일부 공개됐습니다.
이 대회에서 사용된 골프용품은 놀랍게도 한국의 골프용품 브랜드 ‘랭스필드’입니다. 2007년 랭스필드는 ‘2007 평양-남포 통일자전거 경기대회’에 참가해 평양골프장에 ‘LF701′과 ‘골드’ 두 종류의 골프채 30세트를 기증했습니다. 다행히 이 골프채는 ‘너절한 남측 장비’로 단죄되지 않고, 외화벌이를 위해 닳고 또 닳을 때까지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처음 만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이 기분 좋은 표정으로 숙소를 돌아보고 있다. 동아일보 DB
● “잘 친 샷~!”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봄철골프애호가경기를 보도하면서 “이번 경기는 단체경기(총구획별경기, 구획별경기, 남자복식경기, 혼성복식경기)와 구획별 경기방식으로 승부를 겨루는 대항경기로 나눠 진행됐다”고 했습니다. “경기 참가자들은 다양한 치기 기술과 전술을 적극 활용하면서 인상 깊은 경기모습을 펼쳐보였다”라고도 했습니다.
치기 기술과 전술이란 말은 참 생소합니다. 그런데 북한에서 골프를 치려면 기존에 알던 용어를 다 잊어야 합니다.
골프 용어는 거의 다 영어인데, 북한은 이를 다 ‘주체식’으로 바꾸었습니다. 가령 ‘파(Par)’를 ‘기준타격횟수’라고 하고, 그린을 ‘정착지’라고 하는 식입니다.
평양골프장에서 안내원에게 규칙을 설명해달라고 하면 이런 식의 해설이 나옵니다.
“봉사 건물에 도착해 옷을 갈아입고, 위생실도 들려 준비하십시오. 골프장 중간에 있는 간이매대에도 위생실이 있습니다.
1번 타격대에 도착하면 순서대로 공알받침을 놓고, 가장 긴 나무채로 공알을 향해 힘껏 휘두르기를 합니다. 잔디구역에 도착하면 ‘잘 친 샷’ 이렇게 소리치며 박수를 쳐줍니다.
휘두르기를 한 공알이 경계선 밖으로 가면 벌타를 먹고 하나 더 치는데, 모래웅덩이나 물방해물을 잘 피해야 합니다. 그로브는 7번 쇠채로 많이 칩니다.
긴 거리나 짧은 거리가 아닌 첫 중간거리에서 빠를 잡으려면 두 번째 휘두르기로 정착지에 올라타고 커브 구멍에 바닥채를 써서 꽂어넣기나 살짝 공넣기를 하면 됩니다.
꽂아넣기 전문가들은 한번에 넣어 버디를 하기도 합니다….”
북한 용어를 적다 보니, 문뜩 이런 상상이 듭니다. 만약 트럼프 대통령이 평양골프장에서 골프를 치는 날이 온다면, ‘정착지에 올라 탄’ 그의 ‘구멍 꽃아넣기’를 보고 김정은이 옆에서 손뼉을 치며 이렇게 소리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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